[탐방기] 中 동북지역에 닻내린 한의학을 찾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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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中 동북지역에 닻내린 한의학을 찾아(2)
  • 승인 2007.01.0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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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임상의들의 감동적 증언 수집

다음날 아침 6시에 노인 한분이 숙소로 우리를 데리러오셨다. 마을회관에 가니 순전히 개고기만으로 한 상 그득하게 차려져있었다. 거기다 술까지. 개고기안주에 술 한 잔하고 개탕에 밥을 말아 먹은 시각은 6시30분. 아마 내 생에 있어 가장 이른 시각의 술자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식사 후 조금 있으니 마을 노인분들이 한분 두분 모이기 시작해서 어느덧 마을회관이 가득차 40여분쯤 된다. 그분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한쪽에서는 잔치준비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마작하고, 그러다가 10시가 조금 넘어서니 점심상을 차리기 시작하고 11시가 되니까 모든 식사가 다 끝났다.
식사를 마친 후 마을의 연장자를 중심으로 미리 노인회장님에게 부탁드린 좌담회를 가졌다. 자신이 살면서 겪었던 의료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비롯해서 한반도에서 건너온 의사들에 관한 기억과 경험담 등을 2시간 남짓 두런두런 주고받았다.
그분들이 해주시는 이야기는 주로 이성원과 이삼윤이라는 의사의 이야기들이다. 모두들 그분들에게 병 때문에 도움을 받은 기억을 한 두가지씩은 가지고 있었다.

■ 小兒科 명의 이성원 씨

이성원 씨는 앞서 소개한 대로 독립운동가 이정 장군의 아들로서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태어나 10살 때 아버지 이정장군이 일본경찰에 의해 새벽에 끌려가는 광경을 목격하였으며 후에 가목사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가목사의학원을 졸업하였다. 1953년도 가목사시 근처 星火鄕 집체농장에 배치되면서 이곳 성화향 燎原村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분은 성심으로 환자를 대한 점이 이곳 마을사람들의 인상에 깊이 남아있었다. 하루 24시간, 환자가 있다면 잠옷바람이라도 뛰어갔다는 이야기를 누구나가 한다. 특히 소아환자들을 잘 치료하여 주변 한족마을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그야말로 병원은 환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일전에 한국에서 뵈었을 때 이성원 씨 본인의 말에 의하면 환자보느라 담배를 피울 시간은 커녕 담배를 배울 시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성원 씨에 대해서는 중국으로 떠나오기 전 몇 차례 뵈었고 좌담회도 했었기 때문에 특별히 새롭다할만한 내용은 없었지만, 이삼윤이라는 조선족 의사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선했고 이번 가목사여행의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 癖鍼의 大家 이삼윤 씨

이삼윤 씨는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일제 때 만주로 건너가신 분이다. 이분의 특기는 ‘癖鍼’이다. 벽침은 민족의학신문(587호 06년 11월 20일자)에 이성원 씨에 관한 기사를 소개하면서 이성원 씨가 벽침으로 소아환자를 잘 치료했다는 내용을 전한 바 있다. 이 벽침을 이성원 씨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이삼윤 씨이다.
2001년 89세의 나이로 작고하셨는데 이성원 씨가 그곳에서 의학원을 졸업한 정식 의사였다면 이삼윤 씨는 전통 도제식으로 한의학을 배운 명실상부한 한의학전공자인 셈이다.
이삼윤 씨는 약간 연배가 높은 이양권 씨라는 사람에게 의학을 배웠다는데 그 이양권이라는 사람은 곱추였던 모양이다.
이양권 씨는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사람들이 곱추의사라고 하면 “내가 왜 곱추의사인줄 아느냐? 남보다 곱으로 아는 게 많기 때문에 곱추의사다”라고 했다는 말을 마을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 강원 출신 곱추의사 이양권 씨

이삼윤 씨가 만주로 건너와서 동향출신이며 삼촌뻘되는 이양권 씨를 따라다니면서 전통적인 한의학을 전수받았다.
그런데 이분들이 하는 한의학이라는 게 유의들이 하는 의서를 통해 의학을 연구하고 처방을 내고 하는 고급한의학이 아닌 민간요법과 상당수 섞여있는 토속적인 한의학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변에 널려있는 음식과 약재, 도구들을 가지고 질병을 치료하는 식이다.
죽은 아이를 살려냈다는 이야기, 술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주고 그 자리에서 고이 모셔둔 술을 꺼내 나눠마셨다는 이야기, 문화혁명 때 의료도구 몽땅 뺏어간 홍위병 딸을 치료해준 이야기, 어느 집에서 며느리를 보는데 신부집에 예단을 보내려고 하니 “우리 딸은 이삼윤이란 사람이 살려냈으니 예단은 그쪽으로 보내시오”라고 했다는 이야기 등 기이한 행적을 많이 남긴 그야말로 용했던 토박이 의원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이분은 절대로 치료비를 받지 않는단다.
이분에게는 12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중에 4명은 어린나이에 죽고 8명이 있었다. 이중에서 6째인 이해순(58) 씨가 좌담하는 자리에 끼어있어 아버지 이야기를 신이 나서 해준다.
이해순 씨는 아버지에 대한 행적을 몇 가지 이야기해주면서 자기가 그 노하우를 배우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한이라면서 그나마 한국에 가있는 막내동생이 아버지가 했던 것을 많이 배웠고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하니 한국에 가면 꼭 한번 만나보란다.

■ 이삼윤 씨 일화①

다음은 거기서 전해들은 이삼윤 씨에 대한 일화이다.
현재 52세된 박상학 씨에 관한 이야기다. 이 분이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인데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는 숨이 끊어지고 말았단다. 죽은 아이라며 보에 싸서 마당구석에 놔두고 이삼윤 씨에게 우리 대신 우리아들 어디다 잘 묻어달라고 불렀다.
이삼윤 씨가 보에 쌓인 아이를 보면서 ‘잘생긴 아들이었는데 어찌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래도 그냥 보내기 아까우니 제가 한번 시험삼아 해 보겠습니다’하고는 사관에 침을 놓는 등 몇차례 치료를 했다.
얼마 후 아이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그 순간 어찌나 기뻤던지 박상학 씨 부모는 ‘자네가 살려냈으니 오늘부터 자네 아들일세 데려가게’했단다.
그러나 없는 살림에 자식이 많았던 이삼윤씨는 극구 사양했고 결국에는 “그럼 오늘부터 당신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당신 자식들 이름에 따라 이름 지어주게”라고 해서 ‘상학’이란 이름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박상학 씨는 아버지처럼 이삼윤 씨를 대했고 이삼윤 씨가 돌아가셨을 때는 형제들과 나란히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편작창공열전에 나온 괵태자의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관속에 누워 성문을 나서는 장례행렬을 막고 괵태자를 살려냈다는 편작의 일화를 나는 한국한의학에서 발견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계속>

차웅석(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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