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열 칼럼] 한의학 정책에서 개원의가 소외돼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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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열 칼럼] 한의학 정책에서 개원의가 소외돼서는 안 된다
  • 승인 2006.10.2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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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중국의사학자 운슐트(Paul Unschuld) 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중국의학 역사에서 의술을 호구지책으로 삼았던 전체 치료자 중 의서를 통해 교육 받은 치료자 수는 5%도 채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이런 소수의 엘리트 그룹 의학에 과연 중국의학 전통 전체를 대표하는 ‘중국의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전통시대 중국에는 의학 경전을 통해 정식으로 의학을 배운 엘리트 의사 외에도 승려, 주술사, 몇 가지 치료기술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치료하고 돈을 버는 떠돌이 치료사, 약종상 등 다양한 그룹의 치료자들이 존재했다. 지금과 같은 면허제도가 없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어느 그룹의 의학에 중국의학의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충분히 가능하다.

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2006년 4월 현재 한의사 전체수는 16,000명을 상회하며 이 중 11,640명 정도가 개원의라고 한다. 병원협회는 2005년 통계로 전속지도 전문의와 수련의를 합쳐 수련 병원 근무 한의사가 1,100명 정도라고 밝히고 있다. 비수련 병원까지 합치더라도 병원에 근무하는 한의사 전체 숫자는 2,000명을 많이 넘지 않을 것으로 추산된다.
한의사 인력 분포는 이렇지만 실제로 제도권에서 한국 한의학을 대표하는 그룹은 대학과 병원에서 근무하는 교수들이며 이들은 한방의료 정책수립에 필요한 거의 대부분의 정책 자료와 담론을 만들어내는 주생산자가 된다.

이 그룹에서 만들어내는 정책자료에 개원가의 현실이 얼마나 반영되고 있을까? 국시원에서 발주하고 대학 병원교수들이 주도해서 만든 <한의사 직무분석>이라는 보고서의 내용을 보자. 여기에는 임상병리, X-ray 등 각종 검사와 양방 병명진단 등 일반 개원가에서 근무하는 한의사의 일상적인 직무와는 거리가 있는 내용들을 상당수 담고 있다. 그리고 개원의들이 진료실에서 많이 행하는 변증진료행위들은 증후성 질환의 진단과 치료로 뭉뚱그려져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심하게 말하면 이것은 양진한치를 위주로 하는 병원근무 한의사의 직무 분석이지 한의사 인력의 70% 안팎을 차지하는 개원 한의사의 직무분석이 아니다.

그러나 이 <한의사 직무분석>은 제도권 내에서 각종 정책을 수립하는 중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된다. 한의사 국가고시는 물론이고, 국가의 여러 가지 정책결정, 심지어는 한의대 교육을 위한 학습목표 설정, 최근 국립한의학전문대학원의 교육과정 구상에까지 활용된다. 이런 자료 하나를 통해 개원의가 한의학 정책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의사의 KCD(서양의학의 표준질병사인분류체계) 사용을 의무화하는 한의사협회 보험위원회의 결정도 마찬가지다. 학문적인 타당성은 차치하더라도 이 결정이 실제로 시행될 경우 개원의들에게 많은 혼란과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개원의들이 일정 수준의 양방 병명 진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보수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또 개원의들의 양방 병명 진단능력이 궤도에 오르지 못할 경우 각종 의료사고와 보험업무에서 오진으로 인해 감당해야하는 법률적, 경제적 책임과 심리적 압박도 상당할 것이고, 한의사 전체의 전문가로서의 위상 또한 심각하게 위협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개원의들 신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정책적 결정조차도 한의학 발전이라는 명분하에 개원의들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채 내려지고 있다.

한방의료 정책에서 개원의가 소외돼서는 안 된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방의료 신기술들은 개원의들에 의해 발굴되고 발전돼왔다. 약침, 추나기술이 대표적이다. 개원가는 다양한 새로운 임상기술이 개발되고 교육되며, 이와 함께 전통적인 한의학이 보존되는 중요한 공간이다. 전체 한의사 인력의 70%를 차지하는 개원가의 현실은 제도권의 한의학 정책에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
지금처럼 소외가 계속될 경우 한의학 정책과 현실의 괴리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더 나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한의학 정책은 한국 한의학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개업가와 대학의 갈등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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