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조명] 20년 한의협 공직 벗은 이범용 전 한의협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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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조명] 20년 한의협 공직 벗은 이범용 전 한의협 부회장
  • 승인 2006.04.1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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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밴 준비성, 탄탄한 논리로 한의협 발전 견인
‘원칙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끊임없이 노력해온 세월’ 회고
한약재사업, 마포부지 문제 땐 적잖은 맘고생


이범용 원장(50·서울 성북구 유명한의원)에게 3월 30일은 굽이치는 인생의 한 단락을 매듭짓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것은 바로 한의협 회관 이전 건추위원회 해단식을 끝으로 ‘폭풍처럼, 화산처럼, 불꽃처럼 몰아치고 타올랐던’ 20년 한의협 활동을 일단락 짓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로 그는 한 가지 남아 있던 직책인 건추위 부위원장 직을 마감하고 평회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 폭풍처럼 타올랐던 20년 세월

돌이켜보면 그의 삶은 흔치 않은 삶 그 자체였다. 87년 성북구한의사회 반장으로 시작된 그의 공식직함은 88년 중앙대의원과 서울시한의사회 이사, 89년 한의협 40년사 발간, 민족의학신문 창간, 90년부터 6년간 한의협 중앙회 감사, 92년 성북구한의사회 회장, 93년 한약분쟁 당시 약사법 개정 추진위원으로 이어졌다.
96년 부정과 파행으로 얼룩졌던 약사 한약조제시험 파동 당시에는 한의협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어 전 회원 삭발을 주도하며 과천과 장충단공원 집회 및 연이은 보름간의 조계사 농성을 이끌었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5회에 걸쳐 중앙회 부회장으로서 회무의 일선에서 한의협의 각종 정책현안을 입안하고 대국회, 대정부 활동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또 98년부터 2001년까지는 서울시한의사회장 겸 중앙회 부회장으로 재임했다.
아울러 93년부터 시작해온 건추위원 직을 지난 3월 30일 한의사 회관 건축사업을 성공리에 끝내고 건추위가 해산될 때까지 13년간 수행했다.
93년 한약분쟁 당시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시점에 20년 앞을 내다보고 ‘세계 속의 한의학’의 구심점이 될 본부인 ‘한의협 회관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11,111,111원을 맨 처음 기탁하여 회관건립운동을 촉발시킨 것도 그였다.

이런 탓으로 그에게는 다양한 평가가 따라 다녔다. 대의원일 때는 송곳 질문과 대안제시로, 감사일 때는 정확한 회계감사로, 서울시한의사회장일 때는 임기 내내 상근하면서 중앙회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미납회비를 100% 받아내는 유능한 지부장으로, 비상대책위원장일 때는 한의학수호자로서 회원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의 헌신에 힘입어 한의협의 회무체계는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이사회와 한의협 각 조직도 생산적인 의사결정기구로서 발전을 거듭했다. 그 결과 한의협은 힘 있는 단체까지는 아니더라도 규모와 내실의 측면에서 초라한 티를 벗고 지금은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다.

■ 한방의보 공청회로 한의협 입문

이 원장이 처음으로 한의협 회무에 몸담게 된 계기는 1986년 9월 3일 앰배서더호텔에서 열린 공청회를 주도하면서 부터였다. 이때 한의계는 청주청원 한방의보 시범사업 종료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확대실시 되지 않으면 한의학의 제도권 진입이 좌절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약업계와 양의약계의 반대를 업고 정부도 한약의 품질표준화와 가격의 불안정을 명분으로 전국 확대 실시에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취했다. 여기에다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한의계도 보험에 대한 인식이 극히 낮아 추진력이 미약했다.

“앞뒤 상황을 종합해보니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치적인 요인 말고는 전국 확대 실시를 반대할 뚜렷한 논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국민과 언론 속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공청회 개최 계획이 서자 곧바로 당시의 한의협 회장을 만났고 만난 지 10분 만에 공청회 개최 허락을 받아 한의계 최초로 공청회다운 공청회를 치르게 됐다. 공청회는 대성공을 거둬 한방의보 확대 실시에 미온적이던 정부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만30세로 개원 2년차였다.

■ 현장에서 터득한 논리

이후 그는 1988년 ‘맹인안마사가 3호침 이하의 침을 쓸 수 있다’는 보사부장관의 유권해석에 반대해 전회원 비상총회로 소집된 서울 흑석동 원불교회관의 집회에서 제1한강교까지의 가두행진으로 이어진 한의사 최초의 옥외 집회를 성사시킨 데 이어 한약분쟁 과정에서는 한의사를 조직화하는 데서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복잡하게 얽힌 한의계 일을 헌신과 열정만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의협 일을 하다 보면 총론만 준비하고 각론에서 우격다짐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상대단체와 정부, 그리고 국회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전문지식은 보건의료정책의 전환기 때마다 빛을 발했다. 한약분쟁 당시 심야토론에 출연하여 여론조사에서 승리함으로써 정부발표안을 무산시키고 경실련 합의안을 이끌어낸 일, 한의계 50년 숙원사업이었던 ‘한의사 공중보건의 제도권 진입’ 입법과 개정, 약대 6년제 합의 직후 약사회장을 설득해 한약학을 전공하는 학과의 소속을 ‘대학’으로 명시하여 입법화한 일 등은 치밀한 준비와 논리, 해박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했던 사례들로 평가된다.

이런 실력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의 비법을 물어봤다.
“저는 주어진 당면과제를 부여받고 준비하는 방법을 현장에서 배웠습니다. 다른 사람이 써준 원고를 읽기보다 스스로 공부하고, 공부한 내용을 현장에서 확인해서 내 것으로 만든 것이지요. 그래야 논쟁에서 이기고 정책에 반영되는 것이지 목소리가 크다고 정책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지요.”
일을 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다. 한의사에게 좋은 한약을 공급하기 위해 선의로 시작한 한약재직거래사업이 적자에 시달린 것이나 어렵게 구한 한의협회관 마포부지가 도시계획에 묶여 적잖은 맘고생을 해야 했다.

■ 여건 되면 보건정책 포럼 희망

이제 평회원으로서 그는 모처럼 자유로운 몸이 돼 일 속에서 본의 아니게 부딪혀야 했던 사람들과 화해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보건복지정책을 걱정하는 사람들과 정책포럼을 구성하고 싶다고 했다.
1986년부터 2006년까지 20년간의 한의협 공직생활에서 ‘원칙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끊임없이 노력해온 세월’이었다고 회고하는 이범용 회장. 이후 그가 그려갈 삶의 궤적이 그의 숙명인 한의학에 어떻게 또다시 투영될지, 앞으로의 삶의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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