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약초 기행] 13. 삼을 만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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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약초 기행] 13. 삼을 만나는 길
  • 승인 2005.02.2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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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惠 善
작가·연변작가협회 주임


물이 콸콸 쏟아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산 밑에 이르러보니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작은 강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북쪽을 향해 물 속을 행진하며 한참을 내려가다가 동쪽으로 굽어든다. 왼편도 높은 산이고, 오른편도 높은 산이다. 다행히 목적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참을 가니 외딴 오두막집이 나타난다. 그 쪽을 향해 작은 외나무다리 두 개를 건넜다. 참나무들이 뗏목 같이 나란히 누워있고 그 우에 검정버섯이 꽉 재배돼 있었다. 다시 앞을 보니 너비가 수 미터는 될만한 작은 강이 흐르는데 소용돌이가 있는걸 보면 물이 꽤 깊어 보인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데 다리가 떨렸다.

작은 강을 건너고 보니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오두막집의 전경이 보인다. 앞에 작은 연못이 있고 놀랍게도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 피어있다. 뒤쪽은 뽀얀 운무요, 남쪽은 가파롭게 생긴 대릉장산(大楞場山), 그 곳 전체가 삼이라고 한다. 외딴 오두막, 연못, 운무, 삼산. 그야말로 민담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고 스토리다.

《용드레우물》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 동북지구에서 연꽃을 재배한 역사는 발해 때부터 이다. 발해의 수도였던 화룡현 서고성과 훈춘현 팔련성의 성터에서는 연꽃터가 발견됐고, 연꽃무늬막새와 ‘4존불’이 나왔는데, 4존불은 연꽃 속에 돋우어 새긴 것이었다. 발해의 건축물과 부처에는 거의 다 목단과 연꽃도안이 장식돼있다.

대릉장산이 속해있는 통화지구는 발해 제1 수도였던 오동성(돈화시)에 인접해있다. 연꽃을 보며 찬란했던 발해 역사를 떠올려본다. 발해의 연꽃이 천년을 피었다. 지금까지 쭉 피었다. 발해의 멸망과 함께 지어버린 벼꽃이 천년 후 우리 배달민족에 의해 중국의 광활한 동북 수천리 벌판에서 다시 피어난다. 이것 역시 숙명이 아닐까.

산은 가팔랐다. 누구 하나 불만이 없다. 산이 가파른 것이 삼으로 가는 길에는 썩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주인의 발자취를 알려주듯 골짜기에 작은 길이 나있고, 가파른 곳에는 발 하나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흙층계가 만들어져 있다. 가시오가피, 위염에 쓰인다는 무슨 풀 등 약초들이 가득했다.

신 교수는 일일이 약초의 이름을 불렀다. 산중턱에 이르러보니 나무들이 가득한 수림 속에 입사귀가 새파란 삼이 가득 자란다. 오명주 씨는 이 곳이 순수하게 산의 기운에 의해 삼을 키운 삼산이며, 현재로는 중국에서 삼의 나이가 가장 많은 삼산중의 하나라고 소개한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은 삼을 재배한 역사가 서진 말년부터 1600년, 세계에서 인삼재배가 가장 이른 나라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동북삼성의 인삼이 가장 유명했으므로 명말 청초에는 해마다 가을이면 요령성 영구에 동북삼성의 인삼을 집중시켜 장을 보았다고 한다.

21여 년 전에 이 산에 산삼씨를 뿌리고 여태 이 산을 지킨 삼주인 리정전(李正田) 씨가 우리를 마중했다. 돈이 있어도 돈 티를 내지 않는 것이 한족이다. 한족은 아무리 옷차림이 허술한 노인이 죽어도 그가 벴던 베개 속에는 돈다발이 들어있다는 이야기가 조선족 중에는 어떤 탈무드처럼 전해져있다. 한족들이 돈을 잘 모으는데 비하면 조선족은 돈을 잘 쓴다고 우리 신문에서는 많이 비판하곤 한다.

60대의 삼주인의 얼굴에는 삼이라는 것이 적혀있지 않았다. 배추밭을 둘러보러 온 손님이나 마중하듯이 범상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산사람답게 작업복차림을 하고 군살 없이 체소하고 건강해 보인다. 산 중턱에 큰 통나무집이 있고 그 안에 침상용구가 갖춰져 있다. 잘 생기고 위풍스러운 개가 짖어댔다. 역시 삼에 어울리게 체대도 크고 품위 있는 멎진 개였다.

20년 전이면 80년대 초반이다. 중국이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3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개혁개방을 하고, 그로부터 몇 년만에 산삼 씨를 이 산에 뿌렸다는 이야기다. 아직 계획경제와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에서 그 때 벌써 이 산을 도급맡았다는 것, 이 주인의 뛰어난 예단력과 생존력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산은 전체가 삼인데, 도합 백만 평방미터가 된다. 10가구에서 가구당 한쌍씩, 즉 만평방 미터씩 도맡았다.
이정전 씨는 부인, 딸, 아들과 함께 도합 7명 식솔이 이 산에서 살았다. 삼을 지키는 개들도 십여 마리가 있다. 사냥개종자들도 있고 보통 개들도 있는데 아주 영리하단다. 십여 곳에 개들의 초소가 있는데 각자 자기 직무에 충성한다고 한다.

삼이 잘 팔리고 경제수입도 많아지자 이 씨는 삼산을 자식들에게 맡기고 고향 산동으로 떠났다. 나이가 들었으니 낙엽귀근(落葉歸覲)이라고 집도 새집으로 갖추고 편안히 살다가 고향에 묻히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삼이 어른거려 마음이 붙지 않았다. 다시 짐을 꾸려 돌아오니 이제 그들의 고향은 산동이 아닌, 삼이 있는 이 곳이었다. 고향의 새집은 지금도 비어있다고 한다.
10가구가 산 속에서 21년을 삼을 살피며 지키며 살아왔다. 외롭지만은 않다. 와신상담 끝에는 성공이 있기 때문이다. 산 전체가 삼이다.

이들은 후세들까지도 살 수 있는 터전을 꾸렸다. 삼 한 뿌리면 도시 공무원의 한달 월급 이상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부자다. 하지만 그 동안의 고생은 말할 수 없다. 그러는 동안 10가구는 친척처럼 친하게 지낸다. 평소에도 서로 산을 보아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도우면서 사이좋게 살아오고 있다고 한다.

비는 여전히 끝없이 내렸다. 동우당 제약회사와 의논한 끝에 주인은 삼 한 뿌리를 채집하기로 했다. 허담 원장과 신 교수, 정 교수가 그 과정을 섬세하게 녹화했다.
주인은 가위, 삽, 붉은색 천을 맨 루구챌(鹿骨簽, 사슴뼈로 만든 길다란 저가락 모양의 납작한 꼬챙이)을 가지고 삼 하나를 골라 캐기 시작했다. 먼저는 삽을 주변에 깊게 박아 살짝 들고 흙을 살살 털어 낸다. 루구챌로 뿌리가 드러난 쪽의 흙을 살살 파헤쳤다. 불필요한 나무 뿌리들은 가위로 잘랐다. 삼 뿌리는 21년을 그러했듯이 땅속에 사지를 뻗고 혼곤히 잠들어있다. 루구챌로 그 겨드랑이의 흙들을 간지르듯이 하나하나 파헤쳤다. 한 뿌리를 캐는데 40분 가량 걸렸다. <계속>

협찬 : 옴니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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