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의 그늘에 가려진 낙랑국의 숨겨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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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의 그늘에 가려진 낙랑국의 숨겨진 역사
  • 승인 2014.05.2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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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洪均

金洪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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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비평 | 잃어버린 나라, 낙랑

 

이성재 著
어드북스 刊

역사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한다. 문헌연구를 통한 새로운 해석이 그러하고, 발견과 발굴을 통한 오류의 수정이 그러하고, 과학문명의 발달을 통한 기술의 혁신적 발전이 그러하며, 역사연구의 방법론적 발전이 그러하다. 여기에 요즘은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과거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나, 과거 조선초기 우리 역사서의 폐기와 같은 정치적 역사관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바른 역사관을 갖고 오늘날 발달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역사를 규명하는 일은 비단 역사가의 문제만은 아닌 시대가 되었다. 전공의 영역을 넘어 융합된 능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에 이르는 모든 학문분야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경계를 넘어 연구되어야 부족한 역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발굴된 유적과 유물 및 문헌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낙랑(樂浪)’ 하면 한(漢)나라가 세운 네 군현(郡縣)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을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다. 중고교 교과과정에는 낙랑의 위치에 관한 비정이 끊임없이 논란이 되자 이들 군현에 대한 언급을 슬그머니 피하고 있다. 다만 아이들 동화에서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낙랑을 임둔(臨屯)·현도(玄   )·진번(眞蕃)과 더불어 한사군(漢四郡)으로 열심히 외웠던 과거를 기억한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이러한 역사를 배워온 터라 한나라에서 파견된 일개 군현에 불과한 낙랑군에서 어찌 ‘공주’란 말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연구에 몰입하게 된다. ‘낙랑공주’란 말은 낙랑이 국가의 형태를 가진 ‘나라’에서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 때문에 새로운 연구를 통해 기존의 학설들을 재구성하였는데, 결국 한사군의 ‘낙랑군’ 보다 훨씬 이전의 ‘낙랑국(樂浪國)’의 존재를 찾아냈고, 낙랑이라는 나라가 고조선의 영역 안에 버젓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최리(崔理)가 다스리던 낙랑국과 고구려와의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가 와해되던 과정에서 생긴 역사적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즉,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큰 아들인 호동(好童)왕자가 낙랑국 최리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공주를 꾀어 자명고(自鳴鼓)와 뿔 나팔을 망가뜨림으로써 낙랑이 정벌되는 과정을 밝혀냈다. 그동안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그저 설화로 전해지던 것을 이 책의 저자는 사실로 입증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과정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에 가려져 그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던 ‘낙랑국’이 요하(遼河) 서쪽 대릉하(大凌河) 부근에 있었음을 밝히게 되었고, 더불어 고조선의 영역을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난하(   河) 유역까지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이 연구서는 고대사에 관한 고구려 초기 활동을 알아볼 수 있으며, 고조선이 붕괴되고 난 뒤의 낙랑뿐만 아니라 부여(夫餘), 옥저(沃沮), 고구려(高句麗), 동예(東濊) 등의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하나의 쾌거를 이룬 셈이다. 기록만으로는 막연히 짐작할 수밖에 없는 우리 역사의 공백이 실제적인 지도로 그려질 수 있는 사실로 다가온 것이다. 끝으로,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이러한 연구가 우리 의학사(醫學史)에도 고대사의 연구를 위하여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값 1만원>

金洪均
서울 광진구 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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