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학교 다닐 때는 미처 몰랐지만, 이제 아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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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학교 다닐 때는 미처 몰랐지만, 이제 아는 것들…
  • 승인 2012.05.3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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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욱

이정욱

mjmedi@http://


이정욱/서울 해온한의원 원장
입학하고 개론수업 듣고, 예과생활을 보내면서 그땐 교수님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수업시간에는 암기하고, 한자 익히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고,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일방적 교육방식은 교수님들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러면서 마치 이 존엄한 동양의학을 망치는 죄인들이 그들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 하나만은 달라지고 싶었다. 아니 우리 모두가 달라지고 싶었다.

그리고 스터디 모임을 결성해 우리끼리 토론하고 토의하면서 밤을 샜다. 하지만 답을 찾지는 못했다. 대신 의문점만 더욱 늘어갔다. 무조건 암기해야하는 교육과정이 내겐 매우 거북했다. 1학년 때 장학금을 받을 만했던 성적은 2학년 올라가면서 재시, 삼시가 기본이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심각성도 몰랐다. 심각하다기 보다는 당연히 학교의 기성세대 교수님들의 권위에 반감을 가지는 스스로의 모습이 매우 만족스럽고, 동기와 후배들에게조차 당당하게 말하곤 했다.

학교 공부를 소홀히 대하고 싶어졌다. 기성세대 한의사들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이랄까. 결코 교과서 내에 답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서적을 팠다. 서적을 파고 또 파고하면서 마치 그 안에 진정한 답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름 유명하다는 선배들을 찾아다니면서 토의를 했고, 가르침을 얻었고, 술자리에서는 마치 한의학이 대단한 학문이고 전 우주의 진리인 양 열띤 토론을 펼쳤다. 그러면서 마치 우리가 진짜 한의학을 살리고, 살려가는 양, 그러면서 진리는 우리들만의 소유인 것인 양 후배들에게 으스대곤 했다.
조금만 더하면 경혈 경락 본초학 방제학의 마스터가 될 듯 했다. 방학 때마다 고서를 팠고, 비밀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공수련을 하면서 느끼던 희열감도 뭔가 신비롭고 대단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본과 3학년이 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그때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알아왔던 이론, 아니 그 느낌체계, 내 스스로 생각하던 이론체계는 뭔가 균열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임상실습을 하면서 뭔가 이상하고 과거에 공부했던 그 이론, 고서적, 한자들은 더 이상 대단하거나 엄청난 비밀서적도 아니었다.
내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환자의 질병을 유추하고, 정의했지만, 실제의 의료 활동은 전에 알던 그것대로 응용되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이론체계,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선배들이 알려준 이론체계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옷과 옷걸이인 양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학번 과대표를 맡았다. 그리고 수십여 명의 임상교수님들을 접할 기회를 맞았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수업준비를 도와드리면서 다시 교과서와 참고서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의 근거리에서 가장 많은 일을 도맡아 해야 했던 시간이었기에 교과서를 정독하고,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찾던 답이 그 안에 있었다. 아니, 그 안에 정답이 있던 게 아니라 그 어떤 책들보다 더욱 더 논리적인 체계가 그 안에 있었다. 내가 그렇게 부정하고 좌시했던 교과서 안에 가장 임상적인 내용과 이론체계가 녹아 있었다.

그렇게 선배들이 설명해주면서 으스대던, 그리고 내가 스스로 깨닫고 알아내서 대단하다고 느낀 그 이론들이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책의 모퉁이에 조용히 기록되어 있었다.
임상실습을 마치고, 졸업을 하고, 진료현장에서 배우면서 점점 더 궁금한 점은 교과서 내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교과서 식으로 정리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단한 뭔가가 있을 줄 알고 찾고, 궁구하고, 생각하던 그 시절의 복잡함에 익숙해져 있던 내가 점점 현실 속에서 적합하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부분을 더 중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비밀스런 사고가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다시 예과 때의 노트와 교과서를 찾아보았다. 교수님들이 1학년 때 말씀하셨던, 신입생 때 알려주시던 그 이야기들은 그렇게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 접하는 우리를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해 알려주시던 교수님들…. 그런데 그렇게 너무 뻔한 게 아닌 뭔가가 있을 줄 알고 고민하던 내가 좀 우스웠다. 교과서와 노트필기, 그 안에 한의학의 내용과 임상의 내용이 있었다. 내가 으스대면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교과서의 각 모퉁이마다 점잖게 기록되어 있었다. 학교를 부정했지만, 내가 얻었던 지식과 내용은 학교수업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지금 나는 교과서와 교수님께서 강의시간에 해주셨던 기록, 임상실습 때 배운 기록들에 의지해서 진료를 한다. 내가 찾던 것들, 한의학의 진리는 먼 곳에 있는 뜬구름이 아니었다. 생활 속에서 실제 의료활동 속에 녹아 오랜 기간 동안 객관적으로 기록되어왔으며, 그리고 고대의 기록에 국한되지 않고, 끊임없이 발달하고, 변화해 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활발한 임상연구와 재조명을 통해 학문은 점차 객관화되고 있다.

가끔 진리를 본인의 머릿속, 마음속에서 찾는 후배들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이상해진다. 나도 저랬는데…, 나도 저렇게 건방지고, 선배들을 부정했는데…. 하지만 이젠 느낀다. 파랑새는 멀리 있던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었다고.
지금이라도 학교공부를, 수업을 멀리하는 후배들에게, 그리고 대단한 진리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냥 거기 있다고. 학교수업, 교과서, 그 안에 있다고. 그냥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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