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하는 의서 한편은 지방에 살던 한 의원이 자신의 치험 사례를 담은 경험의안으로 임상진료를 통해 터득한 의학이론이 겸비된 의론서이다.
저자인 殷壽龍은 이제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인물로서, 전문연구자의 끈질긴 추적에 의해 그가 전라도 고창 지방에서 활약했던 세습의원의 집안에서 성장하여 입신한 인물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정작 幸州殷氏世譜에는 그를 비롯하여 직계 가족의 그 누구도 의원을 했다거나 이와 같은 저술을 남겼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大靜郡守를 지낸 사실과 선대의 贈職만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은 19세기 조선사회의 신분질서 의식이 여전히 중인계층의 기술직이 전문가로서 합당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1818년에 출생하여 1897년 향년 80세로 사망했다는 생몰연대가 확인된 점이다.
또, 사본의 첫머리에는 ‘高敞殷壽龍德中纂輯’이라고 명기되어 있어 이 경험방이 고창 사는 은수룡의 저작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경험방은 呑吐集이라 명명된 그의 全書 가운데 일부로 전체는 모두 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1~3책은 의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4책은 주역, 5책은 풍수지리서이다. 경험방은 제 1책의 첫 머리부터 시작하는데 經驗方序에는 저자의 저술배경과 감회가 자세히 밝혀져 있다. 이어 偏治法과 처방이 수록되어 있고 2책에는 주로 의론이 실려 있는데 모두 19편에 이른다. 일괄해 보면 五臟論, 總論, 用藥, 尋本, 大要, 大戎, 別付, 似序, 脈按, 大醒, 深究, 別陰陽, 四大成形論, 扶陽抑陰論, 女科, 兒科, 辨乙癸同源論, 傷寒別論, 火變論으로 일정한 순서 없이 나열되어 있다. 이어 3책에는 錦囊覺後論과 처방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독자적인 저술이라기보다는 주로 『馮氏錦囊秘錄』에서 선별 수록한 것들이다.
經驗方序에서 저자는 자신의 성장배경과 의학을 연마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본래 대대로 의원 노릇한 집안 출신으로 『醫學入門』이나 『萬病回春』, 『濟衆新編』, 『東醫寶鑑』과 같은 책들을 늘 가까이 놓고 보았으며 혹은 입으로 외우고 혹은 마음에 새겼다. ……”
그러나 그는 곧이어 조선 중기 법전처럼 받들어지던 동의보감과 후세의학의 명저들을 지루한 古方(‘支離之古方’)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한계점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스스로 조금씩 이치를 깨닫게 된 뒤로는 지루한 古方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救本法’ 한 가지만을 지키기로 하였다.”
그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水, 火, 氣, 血 네 가지에서 비롯된다고 파악하고 火盛, 水渴, 氣虛, 血衰를 만병의 원인으로 간주하였다. 앞서 말한 救本의 治法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으로 네 가지의 부조화를 조절하는 것이 치료의 요점이 된다.
또 치료의 난점으로 증상과 병세가 맞는지 정확하게 시비를 가리는 일, 用藥의 輕重을 정하는 일, 환자가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을 들었다.
이어 경험방 본편에는 11편의 치험 사례가 수록되어 있는데 일일이 다 소개할 순 없지만 대강 제목만 보아도 저자가 사는 지역 인근을 중심으로 여러 계층, 다양한 질환을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茂長 權노인의 셋째 아들 脫症 치험, 宋和中의 며느리 氣虛鬱結症 치험, 申양반 큰 아들 陰症 치험, 朴형의 셋째 아들 失眞 치험, 興德 細谷사는 朴노인 조카딸의 怪證 치험, 長城 朴소년의 癎病 치험, 金仁福의 어린애 복통 치험, 친구 申百源 집안사람의 寒痛 치험, 月湖 金참봉의 風症 치험, 古阜 친구 李允景이 피해를 본 얘기, 우리 집 여종의 急症을 치료한 얘기’ 등.
또한 그는 청대 馮兆張의 『錦囊秘錄』이나 陳士鐸의 『石室秘錄』과 같은 청대 의학의 새로운 성과들을 적극 수용하고 체득하여 임상에 활용함으로써 기존의 의학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치법을 구사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관련 연구자의 후속연구와 국역이 진행되고 있으며, 하루빨리 학계에 발표되기를 기다린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 상 우
(02)3442-1994[204]
answer@kiom.re.kr
저작권자 © 민족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