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조경제 원장(대구 흥생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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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조경제 원장(대구 흥생한의원)
  • 승인 2012.03.1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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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기자

김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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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인술 펼친 九旬 한의사 이야기

 

조경제 원장

사람은 한평생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까? 누구나 가끔은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을 것이다.
대구에서 ‘성서 조약국’으로 널리 알려진 흥생한의원 혜산 조경제 원장은 90세의 연세에도 여전히 종일토록 진료에 충실하며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라 생각한다.  60년 전 약국이나 병원 하나 없던 시골마을에 유일하게 생긴 흥생한의원을 대구 사람들은  ‘성서에서 조씨가 하는 약국’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별칭이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한의사의 꿈을 품고 인류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다짐을 고향에서 60년간 오롯이 실천해오고 있다.

얼마 전 90년 삶을 정리한 「성서조약국-흥생한의원 이야기」는 조 원장의 개인 일대기를 300여점의 사진과 함께 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큰아들 조강래 씨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줄을 서던 환자들을 돌보시느라 따뜻하게 지어놓은 밥이 차갑게 식어버려 점심 한 끼 편히 잡수시지 못하던 숱한 세월을 인내와 긍지로 이겨내시면서 오직 인술을 펼치겠노라는 집념 하나로 외길 걸어오신 분”이라며, “애써 말로 가르치시지 않아도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진리를 몸소 실천하셨다”고 말했다.

조경제 원장은 1922년 가난한 농촌마을인 경북 달성군 달서면 감삼동에서 태어났다.
1930년 보통학교에 입학해 향학열을 가지고 2년 반동안 하루도 결석 없이 열심히 통학하였지만, 홍역을 심하게 앓은 후부터 할머니께서 “약한 몸으로 무리하게 학교에 보내면 위험하다”며 극구 말리셔서 더 이상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의사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맨오른쪽이 조경제 원장. (출처 : 「성서 조약국-흥생한의원 이야기」)

조 원장은 가난하니까 잘 살도록 근면성실하게 마음을 다지고, 학교를 못 다녔으니 학교 다니는 아이들보다 몇 배 공부를 더 하라는 교훈이라 생각하면서 꿈을 키워나간 조숙한 소년이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그는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31세의 나이로 대구 동양의학 전문학원 입학시험에 합격했는데, 낮에는 농사일을 해야 했기에 부득이 야간에 다녀 했다고 한다.

한의사 시험 대비를 위해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해 1954년 3월, 2년 6개월의 야간부 전문 학원을 졸업한 조 원장은 가족들 도움으로 중고 자전거를 한 대 사서 열심히 공부하러 다녔다.

그해 7월 28일 제4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였으며, 한의사 면허 번호는 295번이다.
조 원장은 그 시절에 대해 “나 역시 과연 내가 왜 이렇게 힘든 일을 걷고자 하는지 어떤 때는 그만 포기해버릴까 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행복한 삶, 화목한 가정, 사회에 필요한 인간이 되는  길은 한의사가 되는 것이었다”며 몇 번이고 다짐했다고 한다.

조 원장은 또 “아마도 그런 힘든 상황을 겪어 봤기에 오늘의 평온한 삶이 더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라고 회고했다.

1954년 12월 7일에 대구시 감삼동 193번지에 흥생한의원을 개원했다. 

1954년 12월 대구시 감삼동에서 문을 연 흥생한의원 모습.
조 원장의 삶과 인생철학이 오롯이 담긴 「성서조약국 - 흥생한의원 이야기」에는 가난하지만 치열했던 청년기를 비롯해 한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그의 철학도 녹아 있다. 흑백사진들과 일기를 통해 근검절약과 성실함으로 일관했던 그의 삶의 발자취를 쫓아가다보면,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기록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 시대의 자동차, 생활사를 볼 수 있음은 물론 자식들을 위해 손수 만든 나무 그네, 정원의 연못, 부모님 은혜에 대한 감사, 세상 떠난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등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조 원장은 악필을 교정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일기를 바탕으로 1991년 「내 고향 감삼골」, 2009년 「홍안 회고록」, 「푸른 숲」 등도 출간한 바 있다.
가족애가 남달라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조 원장은 세상 떠나시며 남긴 조모님의 유언을 늘 가슴속에 새기며 그대로 살아가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조 원장의 조모님은 “인생은 무상하여 세상을 하직하나 영혼이 있다면 항상 우리 가정을 위하고 나의 손자 훌륭히 되라고 도울 것이니 교만하지 말고 선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회에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며, “사람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한다.

조 원장은 후배 한의사들에게 “맡은 일에 충실, 근면, 정직하고 최선을 다해 연구할 것”을 당부하고 “의는 인(仁)이니, 피곤하고 괴롭다고 진찰실을 비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고 전했다.

조 원장은 일찍이 지역사회의 기부문화에도 앞장서왔다. 1938년 전체 동민 중에 문맹자가 너무 많아 동사무소에 야학을 설립해 2년 6개월간 가르친 것을 시작으로, 젊은 시절 근검절약한 돈으로 황소 10여 마리를 사서 가난한 농가에 무상으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더불어 1978년에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지만 가난해서 배움을 중단해야 하는 학생들을 돕기 위해 흥생장학회를 만들었다.

1982년에는 지역 노인들을 위한 경로당이 없는 것을 보고 회갑 잔치 대신 감삼동 136평 대지 위에 노인정 ‘수림원’을 지어 무료로 개방했다. 이듬해에는 보다 많은 학생과 노인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흥생 장학회를 수림장학회로 바꾸고 동네 어르신들이 장학회를 자체 운영하도록 하고 조 원장은 장학금만 기부해 오고 있다.

또한 1995년에는 사랑하는 고향을 가꾸고 지키기 위해 한국케이블 TV 푸른방송을 설립해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등 고향문화발전에도 큰 기여를 해왔다. 

조 원장의 고향에 대한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0년에는 달서구문화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종달새 울고 양지바른 언덕에 할미꽃 피던 정다운 내 고장은 가난해서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도 사랑과 인정으로 오순도순 정답게 살아온 삶의 터전이고,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며, “세월은 가고 주위는 산만한 고층건물 숲으로 변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 고향의 전통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여 젊은이들에게 전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 문화원을 설립했다”고 말했다.

조 원장은 “사람들 중에는 나를 명의라고 하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많은 책임과 의무에 성실히 최선을 다할 따름”이라며, “어떤 사람이 어떤 평을 하더라도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아 부끄러움이 없다면 스스로 잘 살아온 길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이 세상 왔다가 가는 마지막 그날까지 환자들의 불편을 치료하기 위해 성심을 다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는 아흔의 한의사.
노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가꿔가는 조 원장의 삶을 통해 나의 가족, 나의 이웃, 나아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김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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