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482) - 「醫宗金鑑」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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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482) - 「醫宗金鑑」②
  • 승인 2011.03.3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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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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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건너간 고려의 인쇄기술

원래 漢代 張仲景이 저술한 「傷寒論」은 「상한잡병론」이라는 한 책으로 묶여져 있었는데, 宋代 林億 등이 교정하여 간행할 때 「상한론」과 「金匱要略」 두 부분으로 나누어 2책으로 만들었다. 두 책을 상한과 잡병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구분한 것이지만은 원래 한 책이었고, 서로 관련된 내용이 많아 「의종금감」에서는 두 가지 책을 다시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仲景全書」라 고쳐 불렀다.

청나라 초기 이전에 위의 두 가지 책에 대한 주해서가 이미 백여 종이 넘었다 하니 얼마나 중요시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제가의 주석을 일일이 다 읽어보기 어려웠고 원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주요 구절만을 가려서 볼 필요가 있었기에 이 책에서는 청대 이전의 各家論說 가운데 중요처를 뽑아서 간략하게 소개하는 한편 원문에 대해 신중하게 교정을 진행하고 의심이 가는 내용에 대하여 正誤 혹은 存疑를 두어 의견을 제시하고 참고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또 전반적인 편차와 장절을 분명하게 구분하였기에 후대 「상한론」과 「金匱要略」의 학습과 연구에 좋은 참고서라는 평을 받았다.

이 책의 편찬에 앞서 당대 갖가지 종류의 의방서와 비전방이 수집되었는데, 대궐 안에 수장된 각종 의서는 물론이요, 書坊에 통용하는 서적들과 현재는 찾아볼 수 없는 옛 책과 아직 판각하지 못한 새로운 의서 및 집안에 비장한 가전의서, 대대로 이어 내려온 經驗良方들을 지방관을 보내어 달래어 사들이거나 혹은 빌려서 초록하고, 혹은 본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바치게 하여 모두 태의원으로 보냈다고 했으니 얼마나 광범위하게 기초자료를 수집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1739년(건륭4)에 작성된 서문에서는 이렇게 태의원에 모아진 의서들을 토대로 “의관들로 하여금 찬수할 것을 명하니 위로는 삼황시대로부터 淸朝[我朝]에 이르기까지 문을 나누고 류를 모아 그릇되고 번거로운[駁雜] 것을 덜어내고 그 정수를 채록하고 그 숨겨진 뜻[餘蘊]을 찾아내고 그 미비한 것을 보충하여 2부를 만들었으니 그 작고 간약한 것은 처음 배우자로 하여금 읽고 외우기 편하게 함이요 그 방대하고 넓은 것은 학자[學成]들로 하여금 참고하기 편하게 함이니 스승된 자로 하여금 반드시 이로부터 가르치고 배우는 자로 하여금 반드시 이로부터 배우게 한다면 의학이 크게 밝아질 것이요 만세토록 백성들의 수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전호에 말한 丁茶山의 「種痘心法要旨」에 이어 1868년에 이르러 黃度淵의 「醫宗損益」  「인용제서」에서는 이 책이 본격적으로 인용되는데, 다만 ‘醫宗金鑑 淸康熙時吳謙’이라고 적어 편찬시기에 있어서 다소 착오를 보이고 있다.

판본으로 乾隆 7년의 초판본은 武英殿聚珍板으로 간행되었고 道光, 同治, 光緖, 宣統 년간에 여러 종류의 刻本이 나왔다. 또 1912년 상무인서관 鉛印本 등 50여종의 판본이 존재하여 그 성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지학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무영전취진판이란 淸代 활자인쇄문화의 꽃으로 동활자를 주조하여 갖가지 귀중한 서책을 찍어 내었다. 이때 무영전의 총감독으로 활약한 戶部侍郞 金簡은 조선족 출신의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四庫全書 가운데 140종의 선본을 가려내 이를 자본으로 활자판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취진판이라 한다. 이후 아름다운 무영전활자본을 본떠 만든 목활자 인본들을 통칭하여 취진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고려조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놀라운 기술과 장인정신은 세계 곳곳에 전해져 꽃처럼 만개하였던 것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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