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479) - 「紫金丹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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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479) - 「紫金丹方」
  • 승인 2011.03.1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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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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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저산 꽃이 피니, 鄕藥草의 봄

 

자금단방

아주 오래 전 이 책의 지은이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神仙太乙紫金丹方」을 소개한 바 있다.(제24회, 史禍에 스러진 실증의학자, 이종준 / 2000. 2. 14字)

저자 이종준은 자가 仲鈞, 호는 齋 혹은 軒·浮休子·尙友堂·太庭逸氏·藏六居士 등을 사용하였는데, 성종-연산군시대에 활동했던 문신 학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金宗直의 문인으로 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귀양길에 올랐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사 1499년 국문 도중에 비명으로 생을 마쳤으나, 그가 죽기 2년 전인 1497년에 저술한 이 책은 훗날 조선의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紫金丹은 후대 내의국에서 납월에 제조하여 배급한 常備藥인 臘藥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그의 책은 조선 중기 이후 「동의보감」 「제중신편」 「의종손익」 등 뿐만 아니라 「납약증치방」이나 「산림경제」와 같은 실용의약서에 두루 轉載되었다.

오늘날 이 책은 국내에 남아 있지 않고 등사본만이 일본 교토대 도서관에 전하는데, 오늘은 이 교토대 사본을 소개하고자 한다. 또 이 사본 이외에 1801년 丹波元簡이 지은 「救急選方」에 인용되어 전하고 있어 일본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사본의 본문 첫 면에는 여러 과의 인기가 찍혀 있다. 그 중 가장 첫머리에는 ‘京都/帝國大學/圖書之印’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정방형의 장서인이 첫 머리에 날인되어 있고 이어 ‘富士川游寄贈’이라고 쓴 장방형의 인장이 찍혀 있어 이 사본이 근대 일본의사학계의 거두인 富士川游씨의 장서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가장 아래에는 장방형의 ‘多紀氏/藏書印’이란 명문이 있어 결국 이 책이 多紀家로부터 전해져 온 것임을 짐작케 한다. 앞서 이 책이 인용된 「救急選方」 역시 다기가(丹波씨가 후에 多紀로 改名)의 한 사람으로 고증의학파의 문호를 연 丹波元簡이 지은 것임을 상기할 때 이 사본이 그의 저술에 직접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첫 장부터 약초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중기 이래 우리 의서에 도화가 희소한 것을 고려하면 매우 소중한 것이다. 線畵로 그려진 그림에는 山茨菰라 적혀 있고 長苗 즉, 새싹이 자라난 상태와 꽃이 핀 開花, 꽃이 시들어가는 시기의 殘花, 씨가 맺힌 結子, 잎이 져버린 葉枯의 상태로 나누어 그려 놓았다.

아울러 山茨菰에 대해서는 「本草」와 「外科精要」 「仙活人心法」 등의 여러 책을 상고하고 자신이 직접 田野에 나가 캐서 확인해 본 결과를 종합하여 실물을 변증해 놓았다. 이런 식으로 산자고를 비롯하여 자금단에 들어가는 약재, 千金子. 文蛤, 紅牙大戟, 麝香 등속을 일일이 대조 고증하여 기록을 남겼다.

특히 사향에 대해서는 자신이 일찍이 燕京에 갔을 적에 진품을 구해 보았으나 오히려 조선산 우량품만 못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 각각의 약재를 合藥하여 조제하는 방법도 상세히 논변하였는데, 조선 전기 향약연구의 단적인 사례로 돌이켜 봄 직하다. 아울러 적응증과 효능, 복용법, 금기 부분은 모두 한글로 언해되어 있어 식자층을 대상으로 쓰여졌다기 보다는 서민을 대상으로 집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문의 끄트머리에는 ‘齋病李宗準仲鈞經驗刊施’라는 말이 적혀 있어 저자가 말년에 직접 채득한 경험과 연구를 통해 얻은 의약지식을 정리하여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의학에 매진하지 않고서 전통의학의 미래를 보장해 줄 방도는 없다는 것이 이 책이 던지는 교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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