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153] 和漢人蔘考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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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153] 和漢人蔘考②
  • 승인 2003.04.1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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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의 비밀지령, 조선인삼 재배 공작

그림설명-和漢人蔘考에 실린 薩摩蔘圖와 識語

조선통신사가 왕래하게 된 것은 전후 실권을 쥔 德川家康이 豊臣秀吉이 저지른 조선침략에 대해 깊히 사죄하고 對馬藩主 宗氏를 앞세워 국교회복을 갈망한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일본을 통치하던 將軍이 바뀔 때마다 가곤 했는데 幕府 통치 260년간 12번의 통신사를 보냈다. 이중 1719년의 사절은 9번째에 해당하며, 4월 11일에 한성을 출발하여 이듬해 1월 24일에 돌아왔으므로 무려 10개월 가까운 시일이 소요되었다.

통신사절의 왕래를 통해 많은 문물이 교역되었으며 그 중 하나로 木棉을 들 수 있다.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는 면화가 재배되지 않아 면포가 한일무역의 대종을 이루었다. 고려말 문익점에 의해 도입되어 재배에 성공한 목화는 2세기 가량 주요수출품목으로 효자노릇을 한 셈이다. 반면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고추, 담배, 토마토, 고구마 등을 전해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1764년 正使 趙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들여올 때 척박한 땅이나 경사진 땅에서도 잘 자라 수확이 많았기 때문에 ‘고우고우이모[孝行芋]’라 불리운 것이 어원이 되기도 하였다.

사행 중에는 가끔 불미스런 사고도 있었는데, 경상감영의 장교였던 崔天宗이 통역인 대마도 왜인 스즈끼의 칼에 맞아 숨지는 살인사건이 발생하였다. 범인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이 사건의 배후에는 인삼밀매의 배분 다툼이 발단이었다는 설도 있어 당시 인삼의 중요성을 다시금 짐작케 한다. 이는 사행의 물목에는 보통 인삼 50근이 들어있었지만 수요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외교문서를 다루는 실무담당자인 製述官으로 동행했던 申維翰의 『海遊錄』에 의하면 에도로 가는 통신사행의 연도에는 조선의 학문을 흠모하고 숭상하는 일인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한다. 大垣에서는 名醫 北尾春圃 부자 여섯이 찾아와 시를 짓고 의학을 물었으며, 그들은 에도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도 일행을 기다렸다가 다시 만났을 정도였다. 또 이들은 이미 그전에 1711년의 사행이었던 조선의원 奇斗文과의 의학문답을 기록한 『桑韓醫談』(1714년)을 책으로 펴내기도 하였다.

한편 朝·日 醫事問答書인『桑韓장갱錄醫談』에서는 百田金峰이 良醫 趙活菴에게 인삼제법·약초류 등에 대하여 질문하였고, 『班荊間譚』에서는 直海龍이 조활암에게 陶弘景의 『名醫別錄』 속에 등장하는 인삼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몇 가지 조목을 물어서 바로잡았으며, 또 『倭韓醫談』에서는 坂上善之가 淺草의 객관 本願寺에서 조선의 여러 학사 및 良醫 李慕庵과 회합하여 人삼에 대해 매우 자세히 질문하였다.

본 책 속의 주인공인 醫官 白興詮은 자가 君平, 호는 西樵로 이 사절의 공식수행의관이었으며, 함께 한 張應斗는 호가 菊溪로 서기의 역할로 종사하였다. 상대편 日人 의원 加藤謙齋는 이름이 忠實로 京都에서 개업하여 이름을 날렸으며, 『醫療手引書』와 稗史小說인 『謙倉實記』를 남긴 인물이다. 이 책을 펴낸 加藤玄順은 謙齋의 아들로 호가 主篤庵, 篤齋이며, 『治痢經驗』에 ‘和漢人蔘考’ 등 유고를 補正하여 실었고 『衆方規矩大成』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 인삼이 일본에 널리 알려진 것은 오래 전부터였으며 17세기 이후로는 연간 1,500~ 2,000근이 수출되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인삼이 良醫도 고치기 어려운 중병에 걸린 사람을 다스리는 기사회생의 靈藥神草로 알려졌으며, 후쿠오카의 貝原益軒(1630~1714)은 『大和本草』에서 조선인삼을 上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또 上人蔘은 조선삼, 小人蔘이나 尾人蔘은 중국산을 지칭할 정도였다.

인삼의 인기가 이렇듯 높아지자 막부의 요시무네[德川吉宗] 장군은 인삼을 재배하기로 하고 1720년 藥草御用掛를 임명하여 조선의 약재를 조사하게 하는 한편 생뿌리를 구해 보내도록 對馬藩에 지시하였다. 이것의 주목적은 조선인삼을 일본 땅에 이식하여 재배하기 위한 저의가 숨겨져 있었다. 이후 인삼이식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1733년에야 개성과 기후가 비슷한 지역에서 재배에 성공하여 이른바 ‘御種人蔘’이 자급 태세를 갖추었지만 약효는 낮은 편이었다. 1790년 이후로는 藥種 인삼씨가 재배를 위해 널리 보급될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 상 우
(02)3442-199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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