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446)-<新修本草>②
상태바
고의서산책(446)-<新修本草>②
  • 승인 2010.03.31 12: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상우

안상우

mjmedi@http://


殘片으로 흩어진 唐本草

고의서 산책(446)-<新修本草>②

신수본초.

 

 


殘片으로 흩어진 唐本草 

현존하는 이 책의 잔편들을 모아 복원 연구를 진행한 결과, 총 851종의 본초가 수집되었다. 전호에도 말했다시피 이 책에 실린 본초학적 성과는 盛唐시대 의약학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자 당대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 국가와의 교역을 통해 얻어진 본초 약물지식의 총화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것이 659년 唐 왕조의 정부에서 제정한 본초서라는 점에 초점을 두어 중국 최초의 藥典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國家藥典이라고 자랑한다. 이것은 1546년에 독일인 V. 코르두스가 뉘른베르크에서 발행한 약전이 서양에서 공공 약전의 시초로 여기는 것에 비하여 9세기 가까이 빠른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은 <舊唐書>· 經籍志와 <新唐書>· 藝文志에 모두 <新修本草>라고 기록한데 비하여 宋代 <通志>· 藝文略과 元代 脫脫 등이 편찬한 <宋史>· 藝文志에서는 <唐本草>라 부른 것을 보아 송대 이후 늦어도 11세기 후반 <證類本草> 편찬 이전에 이미 망실되어 전해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이름만 전하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던 이 책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1899년 돈황 석굴 안에서 손으로 쓴 이 책의 필사본 두루마리가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이 卷子本의 뒷면에는 667년(建封2)이라 적힌 명문이 발견되어 이 책이 본격적으로 반포되기 이전의 문서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쉽게도 권10의 잔권과 권18의 일부 단편만이 수습되었는데,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파리도서관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은 頒行 이후 급속하게 원근 지역에 전파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일본에서 발견된 필사본으로 이것 역시 권자본으로 731년이라고 연대가 밝혀져 있어 당시 일본이 遣唐使를 唐에 보내 구해 돌아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日本 傳本은 1889년 중국의 관리 兵部郎中 傅雲龍이 일본에서 잔본을 模刻해와 자신의 문집 안에 편입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의 중요성과 역사적 가치로 인해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산일된 잔권을 모아 복원을 꾀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고 대만과 일본에서 영인하여 간행되었을 뿐이다. 1981년에 이르러 마침내 세계 전역에 흩어진 잔편들을 모아 모사본을 작성하고 복원본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되었다.

중국,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國家藥典 자랑
코르두스의 서양 공공약전보다 900년 빨라
한‧중‧일 藥材交易역사 짐작케하는 문헌사료


원래 이 책의 편찬에는 李勣, 長孫無忌, 辛茂將, 許敬宗, 孔志約, 許孝崇 등 20여명이 관여되었지만 가장 대표 저작자라 할 수 있는 蘇敬은 정작 <唐書>에는 傳이 실려 있지 않다. 송대에 나온 본초서에는 避諱하느라 蘇恭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唐會要>에 의하면 “右監門府長史 蘇敬이 아뢰기를 陶弘景이 지은 본초가 틀린 곳이 많아 刪定하고 補充할 것을 청하니…… 舊本을 增損하고 천하의 여러 지역에서 나는 약물을 구하여 적고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더니 이에 司空 李勣으로 하여금 총감독하도록 정하고 아울러 그림을 합하여 54권을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蘇敬은 唐本草 편찬의 발의자이자 동시에 편찬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이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 책을 펴낼 당시 그의 나이는 50대였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약물학자이자 醫家로 <蘇恭方>과 <脚氣論> 각 1권을 지었다고 알려졌으나 모두 失傳되었다. 다만 <外臺秘要>와 <本草拾遺>에 그의 <脚氣論> 일부가 인용되어 있고 <證類本草> ‘經史方書目’에 ‘蘇恭方’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에 두루 알려졌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저자들 가운데 의가로서 기억할 만한 이는 李勣, 長孫無忌, 辛茂將, 許敬宗, 于志寧 등인데 李勣은 唐 高祖의 공신으로 黎陽總管上柱國萊國公(후에 司空上柱國에 올라 英國公으로 개칭)을 수여함에 따라 이 책의 대표 저자로 꼽혔다. <증류본초> ‘經史方書目’에 ‘李世勣方’ 1권이 들어 있고 <崇文總目>에 <李勣脈經> 1권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의약에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長孫無忌와 于志寧 두 사람은 則天武后의 원한을 사서 역모를 꾀했다는 무고를 받아 편찬자 명단에서 제외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이름은 무후와 은밀하게 내통한 李勣을 비롯하여 辛茂將, 許敬宗의 이름으로 대체되었다. 이 같이 대규모의 의약서를 펴내는 일에는 정치적인 橫厄이 동반하는 경우도 많아 공을 세우고도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훗날 <의학입문> 歷代醫學姓氏의 明醫조에서는 于志寧이 李勣과 함께 본초서를 지어 크게 성행하였다고 평하였다. 이로써 묻혀버릴 뻔했던 그의 공을 드러내고 역사의 褒貶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許孝崇, 胡子家, 蔣孝璋, 藺復珪, 許弘直, 巢孝儉 등은 史傳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尙藥局의 의관이었다. 許孝崇은 尙藥局 奉御의 職을 지냈으며 <醫心方>에 그가 지은 <篋中方>이 인용되어 있다. 蔣孝璋은 <千金翼方>과 <延年秘錄>에 ‘蔣孝璋方’이 보인다. 蔣孝瑜는 太子藥藏監으로 <외대비요>에 ‘蔣孝瑜方’이 인용되어 있다. 또 孔志約은 唐本草序를 짓고 <本草音義> 20권을 찬술하였다.

이 오래된 본초서가 우리 의학에 편입된 흔적은 명료하지 않지만 고구려에서 産出된 다수의 약재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과 일본에 전래된 이 책이 전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중일 삼국의 고대의약 교류와 藥材交易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헌사료로 상당한 가치가 있다.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전통의학정보연구본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