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집- 한의사 구보 씨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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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특집- 한의사 구보 씨의 하루
  • 승인 2009.12.3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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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성 기자

최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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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한의계 가상 기상도
2010 한의계 가상 기상도- 한의사 구보 씨의 하루
한․양방 협진 관련 개원의들 혼란 예상
한의협 선거․헌재결과 등 한의계 관심 집중

어머니는 아들 구보가 제 방에서 나와 구두를 꺼내 신고 한의원을 향해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일찍 들어오거라.”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구보는 한의사라는 어엿한 직업을 가진 서른네 살의 성인이지만 늙은 어머니에게는 근심거리였다. 요즘 아들은 환자 수가 눈에 띠게 주는 바람에 경영난에 봉착했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틈만 나면 선배 한의사들을 찾아 병원급 의료기관에서 시작된 한의사·의사·치과의사의 협진에 대해 묻고 다닌다. 상호 협진 보험수가 제도시행에 따른 보장이 명확치 않아 아들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구보는 집을 나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강남역으로 향한다. 어머니에게 단 한마디 ‘네’라거나 최소한 ‘늦으면 문자메시지 보낼게요’라는 말이라도 할 걸 하고 후회한다. 저녁 7시에 한의원 문을 닫고 가까운 도서관에 들러 15년만에 KCD-OM3를 공부하다 보면 몸은 파김치가 되고, 한의대생 시절로 회귀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구보는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나오자 갑자기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식욕이 왕성하고 잠도 잘 자지만 울증(鬱症)이 틀림없다.

구보는 떨떠름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본다. 2010년 1월30일 진료비용 침 6000원, 뜸 4000원, 약침 3만원, 추나요법 17만원… 오늘부터 한의원 비급여 진료비용이 평소 5만원 받던 약침이 3만원으로, 30만원 받던 추나가 17만원으로 내려간다. 한의원 등 의료기관은 비급여 대상 항목과 그 비용을 환자들에게 공시할 의무가 생겼기 때문이다.

4년 간 재활의학과 전공의 과정을 견디며 오로지 이 날만 손꼽아 기다린 끝에 전문의 표방을 했지만 고시가격 때문에 일부러 평소보다 저렴한 비용을 받았다. 그동안 갈고 닦은 임상기술과 요법들은 한의원 경영에 별 효험이 없었다.

환자를 치료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됐다. 식당에 가서 자리에 앉는데, 한의협 회장 선거에 나선 모 인사가 식당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이 눈에 띈다. 만날 때마다 실천공약을 내세우며 지지를 부탁한다. 기대가 없지 않지만 참 부담스러운 상대다. 요즘 한의계는 선거 분위기로 다소 들떠있다. 노련함과 추진력, 패기, 회무경력 등 후보들의 특장이 한의사들 입에 오르내린다. 격변의 한의계를 생각하면 이번 회장 선거가 무척 중요하지만 구보는 애써 모 인사를 못본 채 하고 얼른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선다.

오후 6시 평소 친하게 지내던 민족의학신문 기자가 찾아왔다. 65세 이상 정률제 개선안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저는 한방차를 마시겠습니다.”
기자는 한방차를 즐겼다. 구보는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 보약을 먹는 환자보다 양생 개념의 한방차를 찾는 환자들이 부쩍 늘었다. 기자는 전통 한의학에 열의와 관심을 보였다. 어느 틈엔가 구보는 대화에 권태를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부의가 되는 세 가지 방법’으로 화제를 돌렸다.
매선, 미소침, 괄사 등 피부 성형 관련 최신 임상기술을 배워 20~50대 여성환자를 공략하면 경영수입을 늘어날 지도 모른다. 헌데 그것은, 치료의학으로써 인정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 반면 암, 건선, 당뇨 등 양방이 약한 난치병 하나에 집중할 경우 장기적인 투자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고 미래 역시 불투명하다. 차라리 외국인 관광객 환자를 유치하느니 아예 외국으로 건너가 과열된 경쟁을 피해보자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기자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그래서 그것이 어쨌단 말이죠?”라고 물었다. “어쩌기는 무조건 상한선을 18000원까지 올려야 노인들이 계속 한의원을 찾지.” 구보는 오늘 처음으로 명랑한, 혹은 명랑을 가장한 웃음을 지었다.

밤 늦은 거리를 두 사람은 말 없이 걸었다. 기자의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뜬다. 내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의료일원화특별위원회 주최로 열리는 공청회 알림이다. 작년 연말 한나라당 안홍준 의원이 개최한 ‘보건의료의 미래, 의료일원화 필요한가?’ 공청회에서 한․양방 의료교육, 면허 통합론이 제기된 사실이 떠오르면서 일특위의 한방 폄훼가 더욱 심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기자와 헤어지며 구보는 ‘부의가 되는 법’ 중 두 번째 길을 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선배가 권한 협진은 과감히 거절하고 특정 질환에 매달리자고 다짐하며 집으로 향했다.

최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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