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437)- <元子阿只氏藏胎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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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437)- <元子阿只氏藏胎儀軌>
  • 승인 2009.11.1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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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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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 산책/437- <元子阿只氏藏胎儀軌>

 

 


문자와 그림으로 기록한 生命禮讚

매장지 선정 태실 조성 등 효명세자 장태절차 작성
동의보감 産室 장식 임부 위치 胎衣 방향까지 소개 

조선의 기록문화는 오늘날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채롭고 특이한 것이 많다. 사람이 한평생을 지내는 동안 가장 중요한 행사로 冠婚喪祭를 꼽았으며, 개인의 일상사에서 기념할만한 큰 일로 여겼다. 더욱이 조선 왕조에서는 국왕의 혼인을 비롯하여 세자의 책봉, 왕실의 혼례나 장례, 궁궐의 건축 등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중대사를 日記나 謄錄, 儀軌로 제작하여 행사과정을 낱낱이 기록함으로써 훗날의 典範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 중에서도 의궤류는 문자기록과 함께 다양한 장면을 그림으로 곁들여 작성하고 製冊에도 많은 공을 들여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특히 국왕의 일생은 출생의 순간부터 일일이 기록으로 남겨졌는데, 元子의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기록한 <護産廳日記>, 태를 보관할 장소를 선정하고 胎室을 만들어 安葬하는 과정을 기록한 <安胎儀軌>, 국왕으로 등극한 이후 胎封으로 격상하는 절차를 기록한 <胎室加封石欄干造排儀軌> 등이 제작되었다. 또 世子로 정해지면 <世子冊禮都監儀軌>가 만들어지고 혼인할 때에는 <嘉禮都監儀軌>, 국왕이 사망했을 경우에는 <國葬都監儀軌>를 작성하여 일생의 마지막 순간

 

까지 생생하게 기록에 담아냈다.

이밖에도 국가의 주요 행사마다 이러한 의궤가 작성되었는데, 국왕이 농사를 솔선수범해 보이는 <親耕儀軌>, 왕비가 누에를 치는 <親蠶儀軌>, 국왕의 초상을 그리는 <御眞圖寫都監儀軌>, 왕조실록을 편찬하는 <實錄廳儀軌>, 궁궐이나 성곽을 건조하는 <營建都監儀軌>, 왕실의 경사에 잔치를 벌이는 <進饌儀軌> 등 다양한 행사에 기록화가 작성되었다.

이 중에서도 의학과 관련성이 보다 깊은 것은 出生과 産後의 의료체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護産廳日記>나 <安胎儀軌>, <藏胎儀軌> 등이 관심이 간다. 오늘은 1809년 순조 9년에 작성된 효명세자의 장태 절차를 기록한 <元子阿只氏藏胎儀軌>를 예로 삼아 藏胎와 安胎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던 조선시대 의료문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럼 먼저 안태나 장태란 무엇을 말하는가? 민간에서는 보통 아이를 낳은 뒤 태를 땅에 묻거나 불에 태웠다. 혹은 물에 띄워 보내기도 했다고 하는데 드물게는 잘 말려서 보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부모의 가피를 받은 것이라 해서 정결한 항아리에 담아 명산에 묻었다. 또한 풍수설에 바탕을 두고 왕실의 기복을 바래어 安胎使나 相土官을 보내어 吉地를 선택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져 1874년(고종 11년)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탄생하자 그의 태를 묻은 기록이 역시 <원자아기씨장태의궤>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작 제한 등 민폐에도 불구 생명 존중사상 돋보여
산업적 측면 부각하는 의료현실 한 번쯤 곱씹게 해

안태나 장태는 모두 다 태를 묻는다는 의미지만, 安胎는 특별히 산부의 胎盤을 안정시킨다는 의학적인 의미에서 安胎丸이나 安胎飮과 같은 약을 복용하거나 催生符를 붙이기도 하였다. <동의보감> 부인문에는 産室을 꾸미는 방법과 아울러 ‘安産藏胎衣吉方’이라 하여 산실에서 임부가 누울 위치와 胎衣를 갖춰둘 방향을 정하는 방법을 소개해 놓았다.

이 책 본문의 권수제에는 <元子阿只氏安胎儀軌>로 되어 있다. 1781년 건립된 강화 행궁의 외규장각에는 1856년 丙寅洋擾로 소실되기 전까지 전해오던 胎室 관련 의궤 목록이 들어 있었는데, 왕실의 권위와 주요 행사의 전범을 삼기 위한 많은 수의 의궤와 등록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 많은 양의 의궤류가 소실되거나 약탈되었을 것으로 보여 아쉬움이 크다.

안태처를 찾는 일은 觀象監에서 맡아 했는데, 相地官 方慶國이 영평과 춘천, 보은 지역의 태봉을 살펴보기 위해 내려갔다. 吉地가 정해지면 안태할 吉日과 吉時를 日官으로 하여금 가려보게 하였고 장태법에는 5달만에 태를 묻는다 하였다. 복잡하고 엄격한 절차에 따라 안장이 이루어졌지만 여기서 모두 다 설명하기는 어렵고 後錄된 物種을 살펴보면 朱砂, 牛黃, 龍腦, 石雄黃 같은 약재가 소용되었는데, 이러한 물자는 典醫監에서 조달하였다. 胎缸에는 주사로 ‘元子阿只氏胎 安胎使臣洪明浩’라고 썼고 또 주사 우황 용뇌 석웅황을 섞어 항아리 바깥 면에 散布하였다.

모든 과정은 중앙의 관원들과 지방의 감영, 관상감의 교수들이 동원되어 이루어졌고 戶曹를 비롯하여 繕工監, 長興庫, 濟用監, 義盈庫 등 각 관서의 행역과 물자가 차출되었기에 노고가 심하였다. 또한 安胎地로 정해진 해당 지역에서는 경작과 거주가 제한되어 민폐가 많았기에 그 시정을 요구하는 개선안이 여러 차례 강구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렇듯 당대에 제기된 폐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날로 심각해지는 인명 경시 풍조와 저출산 현상을 생각할 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생명 존중의 의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때 이루어진 안태의식은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고, 그 생명이 배태된 胎마저도 조물주의 섭리라 감사하며, 영원한 안식처를 구하여 기리 모시고자 했던 장중한 인간 존엄의 敍事曲이라 할만하다. 오늘날 의학이 생명을 살리는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의료서비스에만 치중한 나머지 산업적인 측면만 부각되고 있는 현실에서 한 번쯤 의학의 본질에 대해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안상우 answer@kiom.re.kr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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