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435] 衛生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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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435] 衛生方
  • 승인 2009.10.2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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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answer@kiom.re.kr


養生의 요체, 精神氣血

양생의학 연구서 <衛生方> 취지 박운 문집에만 남아
박운 퇴계에게 <격몽편> <자양심학지론> 質正 부탁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 중기 명종 대의 학자 朴雲(1493~1562)은 양생의학을 연구하여 <衛生方>이라는 저술을 지었다. 오늘날 비록 그 책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그의 문집인 <용암집> 서문을 통해 그의 의학사상의 편린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기에 작은 지면을 빌리기로 했다.

<국조인물고>에는 박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字는 澤之, 號는 龍巖으로 密陽人이다. 進士 宗元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뛰어난 인재였으며, 松堂 朴英을 좇아가 배우고 힘써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退溪 李滉과 서신을 往復하여 質疑하였으며,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 저술로는 <紫陽心學至論> <擊蒙編> <景行錄> <龍巖日記> <衛生方>이 있다. 己卯년(1519)에 進士에 올랐으며, 宣祖朝에는 孝行으로 旌閭가 세워졌다. …….”

그는 1519년(중종 14) 진사가 되고 명종 때 副司勇을 지냈지만 벼슬이 병조의 미관말직인 종9품 직에 머무른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벼슬살이에는 뜻을 접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황(1501∼1570)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지은 <격몽편>과 <자양심학지론>의 質正을 구한 것으로 보아 학문과 저술에만 치중한 것으로 보인다. 사후에 이황이 碣文을 지어 학문과 덕행을 찬양했다.

그가 학문을 배운 松堂 朴英(1471∼1540) 역시 중종 대에 활약한 대단한 학자로 젊어서 무과로 급제하였고 천문, 지리, 의약, 복서에 두루 능통한 인물이다. 己卯士禍에 해를 입고 낙향하여 문도를 가르치는 한편 약재를 구매하여 活人하는 것으로 뜻을 삼았다고 하니 박운이 의학에 심취한 것도 그에게서 배운 학문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송당 박영은 <경험방>과 <활인방>을 남겼다고 했지만 두 가지 책 역시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당대 퇴계와 같은 석학들과 교유가 많았으며, 그의 양생방이 퇴계가 <활인심방>을 베껴 학문을 연마하면서 도인법을 활용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같은 교류가 있었기에 박운 역시 퇴계와 깊은 학문적 공감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의학사상도 교감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승 박영 천문 지리 의약 복서에 두루 능통한 인물
精血神氣 <동의보감>의 精氣神 3要에 血을 더한 것

박운을 호를 雲巖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원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위의 저술 말고도 <果行錄> <三侯傳>과 같은 저서가 있으며, 문집으로 <龍巖先生文集> 4권을 남겼다. 이 문집의 2권에 ‘위생방서’가 수록되어 있다. 서문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잦은 질병에 시달린 끝에 여러 가지 의방서를 수집하여 살펴보고 그 중 양생의 요점만을 가려 뽑아 이 책을 지었다고 글의 첫머리에 밝히고 있다.

그가 밝힌 夭折의 원인으로는 風寒暑濕과 起居의 失宜, 그리고 飮食男女와 嗜慾의 무절제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稟命 즉 수명을 단축하고 건강을 해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적어두었던 要語를 1편으로 묶고 여기에 여러 방서에서 가려 뽑은 禁忌법과 鄕草(향약본초), 補藥을 덧붙여 ‘위생방’이라고 명명하여 養生하기를 바라는 자로 하여금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고 적었다.

또한 그는 서문의 말미에서 자신은 이미 치아와 머리털이 별로 남지 않았고 精血이 모손되고 神氣가 쇠락하여 억지로 양생법을 행하고자 하여도 할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끄트머리에 嘉靖壬子라고 년기가 밝혀져 있으니 조선 명종 7년 즉, 1552년이요 그의 나이 60세의 시점이다. 스스로 龍巖老人이라고 밝혀 60, 70대에도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과시하는 요즘의 세태와는 사뭇 금석지감이 있다. 하지만 건강의 중요성과 양생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가 건강의 요체로 꼽은 精血과 神氣는 이른바 <동의보감>의 서두에 제시한 精氣神 3要에 血을 더한 것으로 이 시기 이미 精神氣血로 대변되는 한의학의 기본적인 생리구조가 선비들의 머리 속에서도 상식으로 자리 잡아 있었음을 간파할 수 있다.

한편 그가 지은 <關東行錄>에 보면 평소 風冷病을 앓아 고생하던 그를 위해 마침 平海군수에 오른 崔淑이 溫井에 와서 沐浴하기를 권유하자 관동 일대를 돌아보고 여러 날 동안 온천욕을 경험한 기록이 적혀있다. 그는 1달 여에 걸친 관동기행에서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이 13일, 온천욕에 14일을 보내고 유람한 시간은 불과 며칠 되지 않는다고 술회하였다. 또 그는 비록 온천욕으로 자신의 고질병이 낫진 않았지만 관동 일대의 경승을 돌아보았으니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평해온천은 지금의 경북 울진군에 있으며 역대로 온정욕을 위해 서거정, 성현, 이산해와 같은 수많은 명사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913년에 ‘평해백암온천관’이라는 상호의 근대식 여관이 들어섰기에 백암온천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일찍이 양생의 도를 갈구했던 용암 박운의 발길을 기억하고자 한다면 ‘龍巖溫泉’이라 이름 부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지금 살펴보니 <동의보감>과 <제중신편>의 ‘養生延年藥’조에 각기 단 한 구절이 남아있는데, 내 알기론 이 책의 유일한 遺文이 아닌가 싶다.

안상우 answer@kiom.re.kr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091028-기획-고의서산책-위생방-정신기혈-안상우.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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