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427] 救荒本草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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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427] 救荒本草②
  • 승인 2009.07.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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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사의 고장, 보길도를 구한 葛粉餠

『구황본초』를 살펴본 끝에 자연스레 조선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도 궁금해졌다. 언제 어떻게 입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다산 정약용(1762∼1836)의 『與猶堂全書』 詩文集의 策問편 荒政策에 들어 있다.
다산선생은 “……陶弘景의 休糧方에는 산야초를 섞어서 거론하였고 明의 李時珍은 休穀方에 山果를 함께 수록하였다. 또한 후대에 나온 農書에는 이른바 救荒本艸로 많게는 수 백여 종에 달하는 식물이 실려 있어 荒政을 강구하고 있으니 이런 부류에 미칠 수 있겠는가? 대개 救荒하는 정책은 君子가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야 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기근과 질병에 대비하여 사대부와 목민관이 힘써야 할 분야로서 荒政을 손꼽았으며, 이를 위한 방책으로 구황본초를 주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종류의 『구황본초』 판본을 참고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위 문장의 표현이나 시기로 보아 명나라 말기의 과학자 徐光啓(1562∼1633)가 펴낸 『農政全書』본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서광계는 사후 1639년에 간행된 『農政全書』의 ‘荒政’편에 이 『구황본초』의 내용을 수록하고 자신이 작성한 附語를 가필하여 펴냈던 것이다.

또 다산의 『牧民心書』에는 賑荒六條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그 중 ‘補力賑荒第五條’에는 『救荒本草』에 수록된 橡實과 葛根을 採取하여 구황식물로 이용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몸소 겪은 경험담을 덧붙여 놓았는데, 1809년의 대기근에 瘟疫이 치성하여 바다 가운데 섬들도 무사하지 못했는데, 오직 甫吉島의 주민들은 安全하게 목숨을 보전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이 섬에 칡이 많이 자라고 있어 섬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채취하여 葛粉을 장만해서 겨울부터 봄까지 양식으로 삼았고 갈분은 구황식물일 뿐만 아니라 辟瘟하는 효능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섬사람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은 식량이 넉넉해서 갈분을 먹지 않았는데 홀로 癘疾을 만나 온 가족이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白浦 尹氏네 마을에선 2집만 특별히 가난해서 겨우 내내 갈분으로 끼니를 이었는데, 온 마을이 전염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두 집 식구들만은 돌림병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또한 『救荒本草』에서 말한 검은콩을 이용하여 찹쌀떡을 만들어 먹는 방법은 『東醫寶鑑』에 상세히 적혀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상당량의 기본정보는 이미 『동의보감』에 대부분 收括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실학자로 꼽히는 李圭景(1788~1856)이 지은 『五洲衍文長箋散稿』의 山野荒政辨證說에도 이 책이 등장한다. 그는 예전의 지식인들이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바로 ‘救荒本草’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하고 역대 구황본초가 전승되어온 내력의 요지를 열거해 놓았다. 그는 이 책에 대해 명나라 寧憲王 朱權(臞仙)이 지었다고 하여 『活人心法』의 저자와 이 책의 원저자를 서로 혼동하여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규경은 이 책에 대해 “草木 가운데 無毒하여 먹을 수 있는 것을 가려 그 이름을 상세히 밝히고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愛民하는 마음을 千古에 밝게 비추었다”고 극찬하였다.

그는 또 당시 조선에서 성행하던 『山林經濟』(洪萬選이 짓고 柳重臨이 증보한 이 책 역시 저자를 중국의 屠隆으로 오인하고 있다.)에 모든 救荒法을 상세하게 수록하고 우리 東國의 여러 사람들이 빠진 것을 많이 보충하였으므로 자신이 따로 蛇足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여하튼 이 책은 조선에 알려진 이후 구황본초서의 기준이 되었으며, 사대부 지식인들이 황정에 대비한 구휼책을 제시할 필수적인 의약상식과 본초지식을 제공했던 것이다. 의약과 농사, 음식조리 연구에 모두 참고할 가치가 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
(042)868-9442
answer@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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