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병원 도입 이후 가상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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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병원 도입 이후 가상시나리오
  • 승인 2009.05.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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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의사 이OO 씨의 휴가

오늘은 A보험사의 진료비 심사가 있는 날이다. A보험사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병원들과 특히 고소득층이 단골로 이용하는 대형병원들과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민간보험사이다. 환자들은 보험사가 제공하는 정보를 근거로 상품에 가입하여 의료기관을 선택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환자와 민간보험사로부터 선택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서 준비하라고 지시내린 병원장. 철저한 경영마인드로 한방병원을 운영하는 그로서는 보험사에 잘 보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10여년 전에 영리병원이 도입되면서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당연지정제와 관련해 헌재의 위헌판결이 내려진 이후로는 줄곧 이런 상황이니 어쩔 수가 없다.

요양기관이 계약제로 전환되어 민간보험사에 진료비 심사 권한이 넘어간 이후 비급여 진료비마저 보험사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으니…. 그나마 깨끗하고 넓은 건물에서 수억 원의 미국산 최첨단 한방의료기기를 사용하여 진료하고 있고, 수입 역시 한의원에서 근무하는 동료들보다 높아서 가끔 있는 이런 불편함은 견딜만하다.

게다가 내가 몸담고 있는 이곳은 근골격계질환 전문 한방병원으로 특히 관련 한약은 물론 독특한 한약제제 관리로 투자자들의 관심을 끄는 곳이다.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이후 근골격계질환 환자들이 급증해 버렸으니까. 게다가 한약의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계절별 보약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높아졌고 이와 관련한 보험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으니까 말이다.

전화가 왔다. 자동운전모드로 바꾸기 싫은데 그냥 통화해야겠다. 동기녀석이군!
“아, 그래 잘 지냈어? 공기 좋은 곳에서 지내는 게 어때서 그래? 경쟁상대도 없고… 알았어. 한번 알아볼께. 애들?”
요즘 부쩍 전화가 온다. 중소도시나 농어촌 지역에서 근무하는 동기에 후배에 서울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국립병원 말고 민간병원에 자리가 있느냐는 등의 문의다. 지금도 중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에는 한의사는 물론이고 전반적으로 의료인력이 부족한 실정일 텐데. 하지만 같은 한의사로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아! 갑자기 왜 배가 아프지? 앗! 쾅!!
어지럽다. 여긴 어디? 흰 가운의 앳되어 보이는 얼굴의 의사가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정신이 좀 드세요? 저는 L병원 외과의사, 김OO입니다. 이OO 씨 맞으신가요?”
“네...”
“환자분께서는 O월 O일 오전 7시경 뒤따라오던 트럭과의 추돌 사고로 잠시 기절하셨었습니다. 외상은 없으신데 정밀검사를 받으셔야 할 것 같구요. 혹시 우측하복부통증이 있으신가요?”
“네. 사고 전에요.”

“검사에서 급성충수염이 의심된다고 분석되었거든요. 확실한 건 검사를 더 해봐야 하겠지만 수술이 불가피할 꺼 같습니다. 그런데 조회결과 환자분께서 가입하신 보험은 저희 병원에서는 보장받으실 수 없는데 다른 병원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보험 없이 저희 병원을 이용하시겠습니까?”
“비보험이면 병원비가 얼마나?”
“수술비, 입원비, 기타 비용 등 포함해서 3500만원입니다. 검사비는 별도구요. 하지만 L생명에 가입하시면 훨씬 저렴하죠.”

이런… 난 내가 가입한 보험회사가 지정한 병원을 이용했기 때문에 가격이 이렇게 비쌀 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큰 병치레가 없는 나로서는 매달 비싼 보험비를 지급하면서 또 의료보험 가입하기도 버거웠다. 그런데 수술은 이 병원이 잘 하니 그냥 이 병원에서 수술받기로 결정했다.

확실히 비싼 병원비 덕분인지 호텔과 같은 입원 병동에, 매시간 상태 체크하고 미소 짓는 간호사들과 의사들, 그리고 각 입원실 담당 매니저가 수시로 불편사항들을 체크하거나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다주거나 해서 너무 편하다. 몸이 불편한 거 빼고는 휴가 온 것만 같다.

똑똑~. 매니저가 들어왔다. 오후에 우리 한방병원 과장님께서 문병오신다고 알려주었다. 굳이 오실 필요는 없는데 다른 사람 시키면 되는데 직접 오신다니 감사하다.
급성충수염 수술 후에는 운동을 해야 한다며 매니저가 산책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난 혼자 있고 싶기도 해서 혼자 다녀오겠다고 하고 병실 밖을 나와 병원안의 산책로로 향했다. 확실히 우리 한방병원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규모면에서 엄청났다. 수많은 의료인들과 환자들, 그리고 보험회사 직원들….

산책하고 왔더니 과장님께서 와 계셨다.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으신다. 무슨 일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한방병원 맞은편에 초대형 한방병원이 들어선다네.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투자한 MD한방병원주식회사에서 건립하는 것이지. 자네도 알지? 풍부한 자본금을 바탕으로 첨단시설과 고급인력을 갖추고 전세계에 네트워크 병원을 설립한 회사. 이 회사는 기존에 중소병의원을 주로 인수합병 했었는데 이제는 사업을 좀 더 확장하기로 한 건지….”

“뭡니까, 과장님?”
“우리 한방병원을 고발했다네. 한약제제관리에 문제가 있다면서 말이야.”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지…”
“그게 말이야. 문제가 없다고 밝혀져도 한번 의료분쟁에 휘말리면 보험사와 계약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게 돼. 어쩌면 재계약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단골환자들이 더 이상 우리 한방병원을 이용하지 않겠지.”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투자자들은 이 기회에 변화를 주고 싶어 해. 중국 중서의결합의를 고용하겠다는군. 몇 년 전에야 중국에 대한 인식과 언어 문제 등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의사한테 진료 받는 것을 꺼렸지만 지금은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가진 중의사들이 많고, 또 대부분 중서의결합의여서 회사 입장에서 보면 한양방 협진을 위해 한의사와 양의사를 고용하는 것보다는 중서의결합의를 고용하는 편이 인건비가 적게 드니까 당연한 거겠지. 그래서 현재 의사의 80% 이상을 중서의결합의로 대신하겠다는 거야.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회사방침이라 어쩌겠나. 힘없는 의사들은 따라야 하는 수밖에. 자네는 내가 아끼는 후배이기도 하니까 추천서는 잘 써주지. 그동안 수고 많았네.”

잠시 동안의 휴가가 이런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하지 못했다. 내일부터는 나도 이력서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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