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번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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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번역의 탄생
  • 승인 2009.03.0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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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아름다움 일깨우는 번역서

경칩(驚蟄)과 춘분(春分)이 들어있는 3월이 시작되었습니다. 겨울잠 자던 개구리는 대지로 뛰쳐나오고, 겨울방학을 마친 학생들은 학교로 되돌아오는 시기인 것이지요. 사실, 제 입장에서는 새학기가 펼쳐지는 이때가 심적으로 가장 분주하답니다. 다행히 학부 강의는 2학기로 잡혀 있지만, 실습이랍시고 진료실로 들어오는 친구들에겐 또 무슨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하나 꽤 고민스럽기 때문입니다.
대학원 수업은 더 골치 아픕니다. 몇 해 전부터 명·청 시대 명의들의 의서(醫書)를 함께 읽고 토의한 뒤 정성껏 정리하여 나름대로 결과물까지 내놓곤 하였지만, 제 입맛대로 한 학기 수업 용도에 딱 알맞은 분량과 내용을 갖춘 서적을 고르기가 갈수록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희재 님의 『번역의 탄생』이란 역저는 약 1달 전에 접하였습니다. 어차피 이번 학기에도 지난 학기에 시작했던 장석순(張錫純)의 『중약해독(中藥解讀)』을 마저 마무리할 심산이었는데, 이왕이면 대학원생들도 ‘번역’에 대한 개요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책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다가 발견한 책이지요. 물론 우리 과에서 하는 작업은 한문, 정확히는 명말청초(明末淸初) 및 민국시대(民國時代)의 중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므로, 영문 번역 길라잡이 쪽에 가까운 이 책은 적절한 지침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번역이란 원문을 한국어로 길들이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라 생각합니다.

책은 총 20장으로 구분됩니다.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에서 시작하여 20장 ‘셰익스피어와 황진이가 만나려면’의 소제목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우선 모든 번역가의 딜레마인 직역과 의역의 문제를 필두로 삼고, 리듬까지 옮겨야 하는 시 번역의 문제를 맨 나중에 다룬 셈인데, 매 장에는 올바른 번역 방법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특히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과 비교했을 때 갖는 우리말 특성에 대한 설명은 가히 압권입니다.

저자는 각 장마다 ‘살빼기’, ‘덧붙이기’, ‘만들어 쓰기’ 등 추상화된 개념의 소제목을 붙여 자신의 이론을 펼치면서도, 겸손하게 자신만의 현장 경험에 근거해 썼기 때문에 이론서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보편성이 결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20년 동안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들을 독창적으로 갈무리한 아주 멋진 번역이론서였습니다. 본문을 높임말로 쓴 이유도 “존대어가 발달한 한국어의 색깔이 스며든 언문일치체를 만들고 싶은 일종의 객기”라고 하였지만, 저에게는 겸손하면서도 자기 주장만큼은 단호하게 펼치는 학자적 자존심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이 책은 제게 우리말의 아름다움까지 새삼 일깨워주었습니다. 가령 괄호 치고 한자까지 집어넣어 구어(口語)·문어(文語)로 쓰기보다는 입말·글말이 훨씬 간결하고 예쁘지 않습니까? 아, 그렇다고 북한처럼 전구(電球)는 ‘불알’로, 형광등(螢光燈)은 ‘긴 불알’로 고쳐 쓰자는 건 절대 아닙니다.^^ <값 1만7800원>

안세영(경희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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