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만의 티베트 이야기(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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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만의 티베트 이야기(26)
  • 승인 2008.10.1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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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恨은 산에서 내려와 노래가 되었다!

이제 Bike를 타고 떠난 <티베트 이야기>는 종반전으로 달려가고 있다. 앞으로 Tantrism, 天葬, 만다라에 대해 기회가 되는대로 소개하려고 한다. 활자라는 것은 글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 아직 나의 노래는 계속되고 있다.
라룽라(4990m)를 지나서 12km를 지나야 탕라(5050m)가 나온다. 정확한 지도를 읽지 않은 여행기에는 그 바람 부는 언덕을 라룽라로 착각한다. 고개는 산맥으로 나누어지는 분기점이다. 우리에게 嶺과 峙는 이들의 언어로 La와 Che로 이야기 된다. 音韻이 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고개의 전과 후의 기압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늘 바람이 분다. 그래서 바람은 늘 비스듬히 경사를 타고 올라와 상승기류를 만든다. 이 고개에 올라보면 수없이 많은 룽따와 탈쵸와 만나게 된다. 룽따와 탈쵸에서 떨어진 팔리어 경전의 활자들은 그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한 때의 사랑은 언제든 미움으로 바뀔 수 있다. 중국에서 불던 한류열풍이 역풍이 되어서 불고 있다.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에 대해 재중 한인회는 ‘겸따마다(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기)’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 운동보다 문화와 도덕성, 겸손과 관용, 실력과 전문성 이상 중국을 대하는 든든한 무기는 없을 것 같다. 이 말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식 딜레마일 수 있지만 白凡의 ‘내가 원하는 나라’도 진정 이와 같다.

‘(나쁜 짓도)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예전 일본인들의 기생관광 같은 추태와 꼴불견과 부도덕을 우리도 욕하면서 배우지 않았던가? 이런 대책 없는 ‘묻지마 관광’도 상대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스스로 자부심과 명예를 짓밟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도 나를 짓밟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諸病可毉 惟俗不可毉 毉俗唯有書<申欽>(모든 병은 고칠 수 있으나 속된 것만은 고칠 수 없다. 속됨을 고치는 것은 오직 책밖에 없다)”라는 말은 눈팅(俗?)만 하고 책을 읽고 생각하지 않는 卑俗함을 꾸짖고 있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 좁쌀 나라(9.9만평방km)가 살아남는 길을 좌우 모두 함께 모색해 나가야 한다.

영화로 유명해진 이청준 원작 서편제는 ‘소리에 미쳐서 배다른 남매를 데리고 남도를 유랑하는 소리꾼의 가족 일대기’이다. “자네(송화)같이 恨으로 해서 소리가 열리고 한으로 해서 소리가 깊어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것(恨)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일세”라는 말이 있다.
恨과 소리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恨이라는 것이 되레 한 세상 살아가는 힘이 되고 양식이 된다’고 했다. 恨이란 憂卽氣鬱과 悲卽氣消 사이에 존재한다. 이것을 소리로 結者解之한다는 것이 서편제의 이야기다. 失戀당한 이들의 글과 노래에도 悲壯美가 묻어나온다. 글이나 노래로 結者解之하기 때문이다. 떠나간 그 사랑은 어디에~~~!!! 絶唱이 흘러나오게 된다.

산이 전부인 나라, 수없이 핍박을 받은 티베탄들도 이런 恨이 많다. 하얗고 높은 산에서 恨은 굽이굽이 九曲肝腸을 타고 흘러내려와 대지를 적시고 歌나 曲으로 승화된다. 이들도 우리처럼 歌舞나 飮酒를 즐긴다.
周易에서 七艮山卦가 있다. 山은 높고 험해서 멈추게 하고, 막히게 하는 것(艮)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어긋나는 것, 마음이 콱 막히는 것, 마음이 넘지 못하는 것이 한(忄+艮)이다. 고개에는 이런 한이 맺혀 있다.
이들은 La(고개)를 넘고 우리는 아리랑(Arirang)을 넘는 것이다. 이 한풀이가 가무와 축제, 기도와 의식이다. 恨은 산에서 내려와 노래가 되었다!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너무 많은 한이 맺혔다. 남한은 파랭이고 북한은 빨갱이 나라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통탄할 비극이었다. 이 비극 원죄의 진원지는 남조선 해방을 무력으로 강행한 북쪽 정권이다.
그러나 이런 비극을 원격 조정한 것은 물론 강대국이고 외세였다. 남과 북은 서로 미워하고 증오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조폭 똘마니처럼 서로에게 쇠파이프와 사시미 칼, 몽둥이를 휘두른 것이다. 그 상처의 후유증은 너무 깊고 오래갔다. 이제는 그런 맹목적인 증오와 적대감에서 벗어나야 할 때인데도 피해를 당했던 당시의 젊은이들(지금의 노인들) 심지어 지금의 젊은이들조차 ‘빨갱이 신드롬’에 오염되어 있다.

이 시대를 살면서 親北 容共은 금기의 언어다. 빨노파 3개의 원색 중 빨강을 강조해서 이야기하다보면 마녀재판에 회부되어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쓸 수 있다. 한 때 붉은 색은 금기의 색이었다.
그러나 분단 반세기를 넘어 70년을 향해 가는데 舊怨을 아직도 못 풀고 칠칠맞은 칠만 하고 있는 인간의 한계를 누구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 親北容共라는 말이 왜 안 되는가, 親南容自(자본주의)라는 말이 왜 안 되는가? 남한과 북한이 서로 親하고 서로 容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형제들이여, 憎惡의 칼날을 높이 쳐들어라. 그리고 容恕를 구걸하지 말자. 그 날이 오기까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붉은 칠과 憎惡와 咀呪를 담아 담금질과 벼리기에 박차를 기할 것이로다. 그 60년의 痛恨으로 너무 단단하고 예리하게 벼린 그 칼날로 조국의 허리를 가로막은 군사분계선을 난도질하는 ‘칼의 노래’를 부를 그날이 오기를 빈다. <계속>

김규만
서울 은평구 굿모닝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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