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만의 티베트 이야기(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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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만의 티베트 이야기(25)
  • 승인 2008.09.2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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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의 끝은 어디인가? ■

바람과 빛을 風景이라고 한다. 이 삭막한 산과 계곡을 바람과 빛이 채우면서 絶景이 된다. 빛은 대지를 따뜻하게 데우고 말린다. 그러나 빛이 없는 절반의 어둠은 대지를 식게 한다. 그 한열의 차이가 바람을 만들고 구름과 비가 된다. 바람의 충격과 마찰이 소리를 만든다. 결국 빛이 바람을 만들고 바람이 소리를 만들면서 금견실위오성(金堅實爲五聲)이 되는 것이다.

뉴 팅그리(New Tingri)에서 나와 남서쪽 길로 90km를 가면 에베레스트 북쪽 베이스켐프(5040m)가 나온다. 돌아오는 길에 들리기로 하고 우리는 장무 국경을 향해서 달렸다. 하늘이 서울보다 4천m이상 가까운 편이라 햇볕은 몹시 날이 서 있다. 필자가 이 티베트이야기를 쓰면서 상당히 날이 선 중국관을 피력했지만 공정하려고 노력했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거치면서 오랜 시간 세뇌교육과 우민화, 대규모 숙청과 재해 탓인지 5천년 역사가 부끄럽게 단순 무식 지루해져 버렸다. 그리고 중국의 국가주의는 필요이상 예민해져 있다.

헐리우드 여배우 샤론스톤의 쓰촨성 지진 발언에 인민들이 발칵 뒤집어지면서 분노했다. 미국에 공부하러 간 중국여학생이 유학생들 간 대화에서 자국의 티베트정책을 비판하다가 매국노가 되었다. 그녀 가족들의 신상명세서가 인터넷에 뜨고 21세기 사이버공간에 마녀재판이 일어난 것이다. 두 케이스 모두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變을 당한 경우이다. 이런 획일성이 중국의 큰 추동력이자 장점일 수도 있지만 단점이자 재앙이 될 수 있다.

중국은 베이징올림픽으로 한껏 고양되어 있다. 세계 7위라는 초유의 성적을 올린 한국 선수단과 응원단에 차가운 눈초리로 嫌韓, 反韓 감정을 보였다. 한국에서 성화 봉송 시 감정(?)과 쓰촨성 지진 때 한국의 극소수 네티즌들의 지각없는 발언이 중국에 알려져 119구조대를 비롯한 단체의 구호 활동조차 거절해 버렸다고 한다. 이들은 아무리 실용주의로 黑猫白猫를 이야기하지만 자신들이 종주국이었고 우리는 속국으로 한 때 우리 위에 군림했다는 자존심은 버리지 않고 있다. 중국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서 베이징과 상하이는 桑田碧海와 天地開闢(김정일曰)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이렇게 단기간에 엄청난 逢變을 일으키는 것은 가볍고 빠르며 편리한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풍속도이다. 인터넷을 주도하는 언어가 영어로 천하통일되면서 영어문화권사람들은 환호하겠지만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려고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을 응징하기 위해 언어를 다르게 해서 못 알아듣게 한 바벨탑의 신화가 떠오른다. 인터넷은 뜨거운 중국인들을 더 급하게 만들고 있다. 중국은 강대국이다. 천하장사나 K1격투기 챔피언이 술 취해서 연약한 어린이나 여성에게 미친 척한다면 무섭지 않겠는가? 우리가 그런 입장은 아닌가?

다양한 표현기관 중 소리는 가장 쉽고 편리하며 정확한 의사전달 수단이다. 단순한 본능적인 소리에서부터 차츰 진화하면서 세련된 언어가 서서히 정착되었다. 소리는 <마시고 내쉬는 一吸一呼 사이>에 존재한다. 呼出心肺하면서 소리가 나지만 그 뿌리는 들어마시는 吸入肝腎이다. 소리는 정확히 숨을 내 쉴(呼出) 때 이루어진다. 聲音은 입에서 나오고 귀로 들어간다.

五聲은 呼笑歌哭呻(歌는 흥얼거림)이고 五音은 角徵宮商羽를 말한다. 聲音에서 聲은 ‘소리의 뭉치’라서 입으로 내지르는 것이 위주다. 音은 ‘소리의 갈래’로 상대의 귀를 만족시키는 것이 위주다. 聲은 단순한 생각과 본능을 표현하는 ‘소리’다. 音은 고저, 장단, 리듬 등이 어우러진 ‘가락’이다. 聲은 단순하고 즉물적이며 소박한 표현이다. 音은 복잡하고 규칙적이며 예술적인 표현이다.

단순하고 기본적인 의사소통과 노동이나 감정의 기복에 따른 흥얼거림에서, 제천의식이나 샤머니즘 중 단순한 Mantra(주문)의 반복에서 운율과 가락이 생기고 가사의 내용도 점차 복잡해지고 여러 가지 도구(악기)가 활용되면서 틀이 정착되었다.

風塵世上에 喜怒哀樂愛惡慾의 風波가 주는 충격과 억압을 카타르시스 하는 단순한 단말마적 五聲에서 ‘가락과 가사’가 있는 五音으로 진화해 나간 것이 노래이다. 종교, 제사, 주술, 무속 등 儀式에 쓰이는 형이상학적 음악을 正樂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주 해결을 위한 勞動謠, 男女相悅之詞와 愛別離苦가 빗어낸 色聲香味觸(五塵)의 情이 노래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단순한 가사와 가락이 아닌 자기 마음에 또 하나의 소리(Another Voice in one’s Heart)로 피어난다. 그리고 心琴을 울리면서 神을 불러낸다.

길에도 삶의 哀歡이 노래 가락처럼 녹아 흐른다. 팅그리(4340m) 작은 동네에는 장날처럼 사람들이 많다. 구르쵸를 지나 한참을 달리면 라룽라(4990m)가 나오고 여기서 5km만 더 가면 탕라(5050m)가 나온다. 에베레스트의 거대한 산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도에는 Longest Descent in the World(세계에서 가장 긴 내리막)라고 쓰여 있는 아득한 실띠 같이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다본다. 길의 끝은 어디인가, 소리의 끝은 어디인가? 이런 질문에 오직 沈默할 뿐 그저 눈물 같은 風景만 바라보고 있다. <계속>

김규만
서울 은평구 굿모닝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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