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32·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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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32·끝)
  • 승인 2006.04.1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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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 병마용 1호갱

1호갱은 장방형의 군진(軍陣)으로 동서 230m, 남북 62m로 최대의 병마용 군진인데 모든 군사들이 동쪽을 향해 있다.
1호갱의 병력배치는 선봉, 주력, 양날개, 후방호위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일 앞에는 3열 횡대로 손에 궁노(弓弩)를 가진 경무장한 보병토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 줄마다 68개 토용이 있어 모두 204개 토용이 있는데 이들이 선봉부대이다.

선봉부대의 뒤에는 9칸에 4열씩 36열과 양쪽의 2열중 안쪽에 있는 각 1열씩 2열을 합한 38열이 주력 부대인데 9칸의 군사배치는 사이사이에 전차가 배치되어 있다.
군진의 좌우양측에는 각 1열이 밖을 향하고 있는 보병용(步兵俑) 종대가 있는데 이것이 군진의 양날개이다.
그리고 군진의 맨 뒤에는 3열 횡대로 보병용이 자리하고 이 중 1열이 후방을 향하고 있는데 이것이 후방호위부대로 적군이 후부를 습격하는 것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도용(陶俑)과 도마(陶馬)의 배열에 근거하여 추산해 보면 1호용갱(一號俑坑)을 전부 발굴하면 병마용 6천여 건, 전차 45대를 출토할 수 있다고 한다.
보병용(步兵俑)은 제일 큰 사람이 198cm이고 제일 작은 사람이 174cm이며 생김새가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이는 토용을 만들 때 상대방을 모델로 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라 하며, 앞면에는 계급도 표시되어 있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처음 발굴을 했을 때는 채색이 남아 있었는데 발굴 후 3일이 지나자 모두 탈색이 되었다고 한다.
토용의 발밑판에는 만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이는 당시에 실명제로 토용을 만들었음을 나타낸다.
토용의 속은 비어 있고 무릎 아래는 흙으로 채워져 있으며 황토를 구운 흔적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으나 구워서 만들었다는 설이 아직까지 유력하다고 한다.

■ 3호갱은 지휘본부

1호갱의 관람을 마치고 3호갱으로 옮겨 관람했다. 3호용갱에서는 도용(陶俑)이 68건, 도마(陶馬)가 4필, 나무로 만든 전차가 1대 발굴되었는데 현재 지휘본부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3호용갱의 위치가 1호용갱과 2호용갱의 뒤에 있어 두갱의 지휘소가 됨을 추측할 수 있다.

둘째, 차마방(車馬房)에서 출토된 전차는 옻칠을 하고 채색그림을 그렸고 수레위에는 화려한 뚜껑이 있으며 수레에 타는 사람들이 머리에 긴 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이들의 계급이 비교적 높음을 나타낸다.

셋째, 안에 있는 도용(陶俑)들이 모두 사방의 벽을 등지고 서로를 향해서 배열되어 있다. 이는 이들이 경호를 담당하는 호위부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 갱안에서 함께 출토된 30건의 청동으로 만든 창[銅수]이 있는데 이 수(수)는 춘추전국시대 이후에 주로 의장대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손에 동수(銅수)를 가지고 있는 武士俑은 경호를 담당하는 의장대인 것이다.

넷째, 북쪽칸에서 사슴뿔 한개, 동물 뼈 무더기 등을 발견했는데 이곳은 전쟁 전에 점을 치고 기도를 하던 장소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남쪽 칸에는 정청(正廳), 휴게실, 용도(甬道)등이 있고 모두 무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데 당시에 작전을 회의하는 장소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보고나서 2호갱으로 이동했다. 2호갱은 아직 발굴을 하지 않은 상태여서 특별히 볼 것은 없었고 단지 벽쪽에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종합진열루(綜合陣列樓)로 들어가 진열품들을 관람하고 승리반점(勝利飯店)으로 이동해 저녁식사를 했다.

■ 여행의 피로 풀어준 당나라의 춤과 음악

이날의 메뉴는 서태후 만두로 8국 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왔을 때 서태후가 서안으로 도망을 와서 즐겨 먹던 만두라고 한다.
우리들은 보계시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보계의 명주 서봉주를 반주삼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방당악무(방唐樂舞)를 관람하기 위해 섬서가무대극원(陝西歌舞大劇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방)은 모방하고 본뜬다는 뜻으로 방당악무란 당나라의 음악과 춤을 모방하여 공연한다는 뜻이다.
당나라 현종은 궁중 안에 이원(梨園)을 설치해 놓고 이곳에서 악공(樂工)과 궁녀들에게 음악과 무용을 가르쳤는데 중국최초의 황실가무예술학교라 할 수 있다. 지금 화청지에도 이원((梨園)의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한막 한막 펼쳐지는 현란한 군무와 간드러진 노래, 휘황한 조명과 화려한 의상, 그리고 여기에 어울어지는 다채로운 음악소리는 우리 모두를 환상적인 분위기로 몰입하게 하였다.
프로그램 중에는 당현종이 작곡하고 양귀비가 이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도 들어 있었다.

단지 눈과 귀만 즐겁고 모든 노래와 춤의 제목과 주제를 알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이번 여정의 마무리를 장식하고 그 동안 쌓인 피로를 풀어주는 데는 더 이상이 없는 듯 했다.
1시간 10분에 걸친 황홀경에서 깨어나 우리 일행은 짧고도 길었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국을 위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끝>

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그동안 원고를 보내주신 필자와 관심갖고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06년 1월에 다녀온 제6차 중국의학·역사유적탐방기는 정리가 되는대로 본지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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