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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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5)
  • 승인 2006.02.1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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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촬영소 돈황고성 □

우리가 찾아간 곳은 환막영원(環幕影院; 원형극장)이었는데 정전으로 상영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돈황고성(敦煌故城)이라 불리는 영화세트장으로 이동했다. 차 속에서 보니 좌우에 목화밭이 있다. 이곳에서 면화를 많이 생산하는데 솜을 따고 난 목화의 뿌리, 줄기 등을 모두 낙타의 사료로 쓴다고 한다.
왼쪽에 돈황 성벽의 유지가 조금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돈황성은 옛날에 사주성(沙州城)이라 했는데 돈황시구에서 서쪽으로 1㎞되는 당하(黨河)의 서안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한나라 이후 군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AD 400년에 이고가 서량국을 세웠을 때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서역으로 갈 때 남북으로 길이 나뉘어 남쪽으로 가면 양관(陽關)을 지나고 북쪽으로 가면 옥문관(玉門關)을 지나 서역으로 직통한다.
돈황고성은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아 우리는 금세 도착했다. 이곳은 1987년 중국, 일본이 합작하여 만든 역사 영화 “돈황”을 찍기 위해 만든 곳으로 중국 송나라 때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모델로 하고 고사주성(古沙州城)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돈황고성은 방송사주성(방宋沙州城) 혹은 돈황 영화촬영소(敦煌電影城)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사막 한 가운데 신기루처럼 우뚝 서 있다.
우리가 성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나 연속극 등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해 놓고 있었는데 주요 작품으로는 돈황 이외에 봉신연의(封神演義), 돈황야담(敦煌野談), 좌종당(左宗棠), 신용문객잔, 제천대성 손오공, 정검산하(情劍山河) 등이 있었다.

□ 사막의 화랑 막고굴 관람 □

호텔로 돌아와 중식 후 1시 30분에 막고굴을 관람하기 위해 출발했다. 양관로(陽關路)와 사주로(沙州路)가 만나는 곳을 비천(飛天)광장이라 하는데 이곳에는 돈황의 성표(城標)인 반탄비파(反彈琵琶) 조소상(雕塑像)이 있다. 비파를 머리 뒤 왼쪽 어깨 위에 올리고 오른손을 머리 뒤로 올려 비파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돈황 막고굴에 있는 그림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막고굴은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하는데 돈황시구에서 동남쪽으로 25km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표를 사서 다리를 건너 입구로 들어가니 막고굴(莫高窟)이란 쓴 패방이 있는데 앞에는 석실보장(石室寶藏)이라 쓰여 있고 뒤에는 삼위람승(三危攬승)이라 씌어 있다.
석실보장은 돌을 파서 만든 동굴 속에 보배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고 삼위람승은 맞은편의 삼위산이 승지를 끌어안고 있다는 뜻이다. 막고굴(莫高窟)이란 명칭은 일찍이 전진(前秦) 동굴중에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막고굴이 조성된 명사산 동쪽의 암벽은 주위가 모두 대사막으로 그 지형이 돈황보다 100여미터 정도가 높다. 고대 중국어에서 사막의 막(漠)자와 막고굴의 막(莫)자는 통용해서 쓴다. 사막의 높은 곳에 판 석굴을 막고굴(漠高窟)이라 불렀고 뒤에 점차 변하여 막고굴(莫高窟)이 된 것이다.

둘째, 고대에 돈황의 명사산은 막고산(漠高山)이라고도 불렀고 산 아래에 또한 막고향(漠高鄕)이 있었다. 천불동은 막고산(漠高山) 아래에 있고 막고향(漠高鄕)에서 관할했다. 막고굴(莫高窟)의 명칭은 막고산(漠高山) 막고향(漠高鄕)에서 연변(演變)되어 온 것이다.

셋째, 대천하(大泉河) 골짜기에서 가장 먼저 굴을 판 사람은 낙준화상(樂준和尙)이다. 뒤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석굴을 팠지만 도행(道行)이 모두 “막고우차승(莫高于此僧; 이 스님보다 높은 사람이 없다)”하여 그를 뛰어 넘을 수가 없었다. 즉 막고굴(莫高窟)이라 부른 것은 낙준(樂준)이 첫 번째 굴을 판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막고굴은 명사산을 등지고 동향을 하고 있으며 삼위산(三危山)과 마주보고 있다. 두산사이에는 대천하(大泉河; 宕泉河라고도 한다)가 있는데 물이 없는 간구(幹溝)이고 가끔 비가 내렸을 때만 물이 흘러간다.
막고굴은 남북으로 1618m로 뻗은 모래암석층에 높이와 크기가 다르게 층층으로 모두 491개의 석굴(일반서적에는 모두 492개의 석굴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 485번 석굴이 중복으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이 조성되어 있는데 적은 곳은 일이층이고 많은 곳은 사오층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모두 50m에 이른다.

석굴 사이에는 잔도(棧道)로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그리고 다시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지(之)자 형으로 번호를 부여하였다. 이곳 491개의 동굴 중에는 모두 1045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4만5천여 평방미터에 이르러 높이 1m로 배열을 하면 45km에 이르는 예술 화랑을 설치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굴 안에는 2천5백여 개의 입체불상과 1천여 개의 벽에 붙여서 만든 조형상 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막의 한 가운데 이러한 굴을 처음으로 판 사람은 누구이며 어떠한 동기에서 시작하였는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기록에 의하면 366년 계행이 청정하고 수행이 돈독했던 낙준 스님이 이곳에 왔는데 갑자기 앞의 삼위산에서 금빛이 빛나는데 천불(千佛)의 형상이 나타나신 것 같았다. 이에 크게 감동한 스님은 사다리를 놓고 굴을 파서 처음으로 하나의 감실(龕室)을 만들었다고 한다. 뒤이어 법량(法良)선사가 이곳에 이르러 낙준스님이 판 굴 옆에 새로운 굴을 파서 절을 만들었고 이후에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잇달아 굴을 파기 시작하여 당나라 초기에는 1천여 개의 굴이 만들어졌고 오대(五代) 이후에는 새로운 굴을 팔 곳이 없어 옛날 굴을 수리하든가 혹은 확장 수리하여 원나라 때까지 이 작업을 지속해 왔다고 한다.

막고굴은 크게 3개 시기로 나누어 예술적인 가치를 파악하고 있는데 초기는 발전기로써 북량(北凉 397~439년), 북위(北魏 386~534년, 돈황을 통치한 시기는 439~534년), 서위(西魏 535~557년), 북주(北周 557~581년)시대까지이고, 중기는 극성기로서 수(隋 581~618년), 당(唐 618~907년, 781~848년까지는 吐番이 돈황을 통치, 848~914까지 張議潮 및 그 후손이 통치)시기이고 말기는 쇠락기로 오대(五代 907~960년), 송(914년부터 1036년까지 曹議金 및 그 후손이 통치), 서하(1036년부터 1227년까지 돈황통치), 원(1227년부터 1404년까지 돈황지배)시기이다. <계속>

윤창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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