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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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4)
  • 승인 2006.02.03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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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산과 월아천 ■

7월 17일(2004년), 오늘은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실크로드의 명주(明珠) 돈황의 명승지를 관광하는 날이다. 오전에 명사산(鳴沙山)과 월아천(月牙泉)을 보고 오후에 막고굴(莫高窟)을 관람한다고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시에서 남쪽으로 5㎞ 정도 떨어진 명사산을 향해 출발했다. 명사산은 동한시대에는 사각산(沙角山)이라 했고 세속에서는 신사산(神沙山)이라 했으며 진(晉)나라 때부터 명사산이라 했다한다. 동서의 길이가 40㎞이고 남북의 너비가 20㎞이며 해발 1715m라 한다.

멀리서 바라보니 산 전체는 모래가 쌓여져 이루어졌고 모래봉우리가 가파르며 산등성이는 칼날과 같았다. 햇빛을 받아 명암(明暗)이 대조를 이루는데 곡선이 무척 아름다웠다.
모래는 붉은색, 노란색, 녹색, 흰색, 흙색의 오색으로 이루어져있고 한여름에 밟으면 모래가 팽창되어 서로 마찰되어 저절로 소리가 나서 명사산(鳴沙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 사람이 모래를 타고 아래로 미끄러지면 북치고 나팔을 부는 소리가 나는데 약하면 사죽지성(絲竹之聲)과 같고 강하면 천둥치는 것과 같아 이를 사령청명(沙嶺晴鳴)이라 한다고 한다.

명사산의 모래 소리는 희세(稀世)의 기관(奇觀)으로 혹자는 이를 천지의 기향(奇響)이며 자연의 묘음(妙音)이라 부른다.
명사산의 입구에 도착하니 앞에는 “명사산 월아천”, 뒤에는 “수수기산(秀水奇山)”이라 씌어 있다. 우리는 낙타를 타고 사막체험을 하면서 월아천에 이르니 제일천(第一泉)이란 글이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월아천은 명사산의 품속에 비취(翡翠)처럼 누워있는 샘으로 초승달의 모습과 같아서 월아천이라 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모래 속에 있다하여 사정(沙井)이라 하고 이 물을 마시면 장생불로한다고 하여 약천(藥泉)이라 했으며 샘물 속에는 철배어(鐵背魚)와 칠성초(七星草)가 자라고 있다한다.

모래와 물이 서로 이어져 있지만 수천년이 지나도록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모래에 의하여 묻히지 않고 샘이 사막 한가운데 있지만 흐려지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아 이처럼 샘과 모래가 함께 공존하는 것은 천하의 기관(奇觀)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월아천의 주위를 따라 걸었다. 샘의 주위에는 갈대[蘆葦]가 자라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월천각(月泉閣)이 우뚝 서 있다. 우리는 150m 정도 되는 월아천을 안고 돌아 석조(夕照)라고 쓴 현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월아천 역사진열실이 있었다.

전시된 것은 홍류(紅柳), 사조(沙棗) 등이 있었고 명사산 삼보(三寶) 중의 하나라는 오색사(五色沙), 노근(蘆根) 등이 있었다.
다시 월천각(月泉閣)으로 올라갔다. 월천각이란 글씨는 중국의 불교협회 회장으로 있는 조박초가 쓴 것이다. 맞은편 건물은 청뢰헌(聽雷軒)이라 되어 있는데 마치 천둥치듯 울리는 천하의 기관인 명사(鳴沙)를 듣는 곳이란 뜻이리라! 파란하늘과 고운 모래산, 그리고 비취같이 푸르고 맑은 월아천가에 세워진 우뚝 솟은 건물군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중심에 우리들이 서 있는 것이다.

월천각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니 좌우에 접시꽃이 활짝 피어 우리를 반기고 있다. 다음의 일정은 명사산의 중턱에 올라가 지상까지 모래썰매를 타는 것이다. 조그만 카드를 하나씩 나누어 주는데 앞에는 명사산 월아천이라 씌어있고 뒤에는 활사빙증(滑沙憑證)이라 씌어 있다. 모래썰매를 타는 증명서라는 뜻이다.
모래썰매를 타기 위해 산으로 오르니 맞은편의 모래산과 초승달 모양이 완연한 월아천, 월천각, 그리고 인공호수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 월천효철(月泉曉澈)과 월천효월(月泉曉月)은 사령청명(沙嶺晴鳴)과 더불어 모두 돈황팔경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바람이 부니 날리는 모래가 너무도 곱고 자잘하다. 모래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문득 그 옛날 이러한 사막의 모래바람을 헤치고 사막을 건넜던 대상이나 구법승 등을 생각해 본다.
생명을 건 여정이었으리라. 대상들은 일확천금을 손에 넣을 희망을 가지고, 구법승들은 진리의 한 소식을 듣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사막의 길을 걷고 또 걸었으리라.
우리 일행은 모래썰매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낙타를 타고 입구를 향해 되돌아 나왔다.

명사산과 월아천의 관람을 마치고 차를 타고 나오는데 왼쪽에 사생식물원(沙生植物園)이 있고 월아천 농가원(農家園) 돈황 이광행기지(李廣杏基地)라 씌어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살구를 이광행(李廣杏)이라 하고 복숭아를 이광도(李廣桃)라고 하는데 서한시대의 명장 이광(B.C. 186~119)이 흉노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돈황으로 이 과일들을 들여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이광은 전국시대 말기에 진시황의 명을 받고 연태자 단을 사로잡은 이신(李信)장군의 후손이다. 그는 활을 잘 쏘았고 흉노와 70여 차례나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벼슬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사마천이 죽음을 무릅쓰고 변호했던 이릉(李陵)은 그의 손자이고 서량왕(西凉王) 이고(李暠)는 그의 16세손이다. 그리고 이고의 7세손이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李淵)이다. <계속>

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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