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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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3)
  • 승인 2006.01.2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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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종당이 심은 버드나무 가로수 □

야광배 제조공장을 견학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황량한 오아시스에 세워진 도시지만 싱싱한 야채가 점심상에 올라와 오랜만에 상추쌈도 먹어보고 서량(西凉)맥주로 갈증도 풀었다.
일행은 오후 2시 20분 가욕관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다시 돈황을 향해 출발했다.

돈황에 도착하려면 옥문(玉門)과 안서(安西)를 거쳐야 한다. 광활한 사막에 인공의 손길이 미쳐 풍력(風力)발전소도 보인다. 근 2시간을 서쪽으로 달려 도착한 곳은 옥문시(玉門市)였다. 이곳에는 유전(油田)이 있는데 지금은 석유가 나오지 않아 거의 폐광된 상태라 한다.

우리는 다시 안서(安西)를 향해 출발했다. 길가에 심어진 버드나무 가로수는 굵고 하늘높이 치솟아 한국의 어느 길가의 가로수에 비교해보더라도 손색이 없다.
이 버드나무는 가욕관에서 신강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많이 심어진 것을 볼 수 있다하는데 이를 좌공류(左公柳)라고 부른다고 한다.

좌공(左公)은 좌종당(左宗棠)이다. 그는 호남의 회음(淮陰)사람으로 나무 심는 것을 아주 좋아하였다.
예로부터 하서(河西)에는 나무 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는데 좌종당이 군사를 이끌고 신강으로 반란군을 토벌하러 갈 때 군대에 명하여 길을 따라 버드나무를 심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천리 길에 걸쳐 버드나무 가로수 길이 생겨나게 되어 변방의 기관(奇觀)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무는 심는 것뿐만 아니라 잘 관리해야만 하는데 좌종당이 주천에 개선해왔을 때 한 농민이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와 일을 볼 때 나귀를 나무에 매어두었다. 나귀는 한가롭게 나무껍질을 벗겨먹고 있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좌종당은 명령을 내려 고루(鼓樓)앞에서 당나귀의 목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는 통고하기를 “만약 다시 나귀가 나무를 손상시키면 나귀와 나귀의 주인은 이 나귀와 똑같이 죄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고 그가 심었던 버드나무는 잘 보전되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 고비사막의 특산품 쇄양 □

교만성(橋灣成) 휴게소에서 잠깐 쉬는 사이 상점을 둘러보았다. 상점에는 쇄양(鎖陽)을 비롯한 육종용 등 한약재와 안서현(安西縣)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팔고 있었다.
안서는 동쪽의 가욕관과 서쪽의 돈황 사이에 있는 실크로드의 중진(重鎭)으로 감숙성에서 면화를 가장 많이 생산하고 과일도 많이 생산한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유적으로는 유림굴(楡林窟), 동천불동(東千佛洞), 쇄양성, 교만성 등의 古城이 있다고 한다.

이곳의 특산은 무엇보다도 쇄양인 듯 했다. 설명서를 한 장 구해 읽어보니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었다.
쇄양은 불로초(不老草), 지모구(地毛球), 금불환(金不換), 사막인삼이라고도 부르는데 고비사막에서 야생(野生)하고 인공적으로는 재배할 수 없으며 영하 20도 전후에서 생장한다.

자라는 곳에는 눈이 쌓이지 않고 얼지도 않는다. 철경록(輟耕錄), 본초강목(本草綱目)의 기재에 의하면 쇄양은 자음장양(滋陰壯陽)의 효과가 육종용보다 100배나 뛰어나다.
쇄양은 1기(奇), 2특(特), 3보(補)의 특징이 있는데 일기는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어 계절과 반대로 생장하고, 이특은 일종의 기생식물이라는 것이고, 삼보는 고정(固精)의 작용이 뛰어나 신허(腎虛), 양위(陽萎), 위한(胃寒), 불면(不眠)에 쓰는데 온이부조(溫而不燥)하여 심혈관계, 비뇨기계, 갱년기 장애 등에 많이 활용한다.

또 쇄양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태자 이치(李治)와 명장인 설인귀(薛仁貴)에게 명하여 신강성에 있는 적을 치게 하였는데 그들이 이곳 안서에 있는 고욕성(苦욕城)에 이르렀을 때 이곳에 매복하고 있던 하미국(哈密國) 원수(元帥) 소보동(蘇보同)의 대군에게 포위되었다.

식량은 떨어지고 구원이 끊긴 위험한 엄동설한의 상황 속에서 설인귀는 성내외에서 자라고 있는 쇄양의 뿌리와 줄기를 캐어 먹어 굶주림을 달래면서 노장군 정교금(程咬金)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포위를 풀어줄 때까지 잘 버티어 전군(全軍)을 보존하였다.

이후 적의 포위를 격파하고 천리를 추격하여 연속하여 큰 공을 세웠다. 당태종 이세민은 보고를 들은 후 쇄양으로 군사를 구원하고 공을 세웠다고 하여 드디어 고욕성(苦욕城)을 쇄양성(鎖陽城)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명하였다한다. 쇄양성은 지금 교만성과 안서현성의 사이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 안서에서 돈황까지 □

안서(安西)는 옛날에 과주(瓜州)라 했는데 서방안정(西方安定)의 뜻을 취해 안서라 했다한다.
좌회전을 하니 과주영빈호(瓜州迎賓湖)가 오른쪽에 있다. 물 한방울 없는 사막에서 호수를 보니 물이 생명의 근원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내를 지나는데 안서의 성표(城標)인 과주선자(瓜州仙子)가 길의 중앙에 조상되어 있는데 금세라도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갈 것만 같다.

안서를 지나 우리는 돈황을 향해 가다가 잠시 쉬어서 길가에서 팔고 있는 수박과 하미과 등을 사서 나누어 먹었다. 하미과는 이전에도 한 두번 먹어 본 적이 있지만 사막지대라서 그런지 당도가 아주 높았다.
다시 돈황을 향해 달리는데 사막 위에 낙타자(駱駝刺)가 많이 보인다. 낙타자는 낙타초라고도 하는데 가시가 있지만 낙타는 혀와 입속을 찔리면서 이 풀을 뜯어먹는다고 한다. 홍류(紅柳)도 가끔 나타나는데 온 땅을 뒤덮고 있는 곳도 있으며 낙타풀보다는 키가 크다.

왼쪽에 돈황 비행장 가는 길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 거의 도착한 듯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8시인데도 해는 서천에 걸려 넘어갈 생각이 없다. 돈황의 시내가 가까워오니 농작물도 많이 재배하고 나무도 무성하다.
현재 돈황의 인구는 9만정도인데 이곳에 눌러앉아 사는 사람이 5만여명 되고 장사하는 사람이 4만정도라 하는데 관광철이 지나면 이들은 떠난다고 한다. 우리는 곧장 음식점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돈황의 사주대주점(沙州大酒店)에서 여정을 풀었다. <계속>

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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