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배원식 선생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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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배원식 선생의 생애와 업적
  • 승인 2006.01.1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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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계 이끈 仁心儒術의 지도자

근현대한의학의 산 증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배원식 선생은 1914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한 그는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피부병이 돋아 포기하고 부친의 친구가 운영하는 동제의원에 들어가 의학입문을 배웠다. 그후 평양의전의 전신인 기성 의학 강습소에 들어가 서양의학을 배우기도 했으나 그후 만주 신경(현재의 장춘)으로 건너가 만주국 한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함으로서 정식 한의사로서 길을 걸었다.

그는 임상한의사로서, 한의학의 교육자로서, 국제동양의학계의 대부로서, 혹은 잡지의 창간자로서 뭇한의사들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1956년 ‘醫林’을 창간했으며 동방의학회와 한국동양의학회를 창설한 것도 그다.
국제활동무대에서 그의 역할을 가히 절대적이었다. 일본, 대만, 중국 등 전세계 한의학계와 네트워크를 구축한 성과를 바탕으로 국제동양의학회(ISOM)를 창립할 수 있었다.

배원식 선생은 한의학문에도 상당한 안목과 식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갈 때에도 한의학서적만 몇 상자 갖고 내려갈 정도로 책 사랑이 유별났다. 공부하는 습관도 몸에 배 새벽 2시에 기상하여 6시까지 공부하는 일과가 88세까지 이어졌다.

배원식 선생은 임상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한의계의 지도자였다. 2회(1968.4~70.6)에 걸쳐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해 후배들을 격려하는 등 한의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그는 중국의 20세기 중의 명의 96인에 선정된 바 있으며 대전대학교 지산한의학상(03년)을 수상했다.

배 선생의 평생의 좌우명은 ‘仁心儒術’이다. 부산피난시절 국회의장이었던 신익희 선생이 써준 仁心儒術 功同良相(어진 마음으로 의술을 베푸는 것은 재상의 功과 같다)에서 따온 글귀다. 조상이 물려준 한의학은 계승 발전시킬 가치가 있다는 뜻에서 이 글귀를 그는 소중히 여겼다.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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