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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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0)
  • 승인 2006.01.0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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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대한한의학원전학회장


□ 현벽장성 □

현벽장성(懸壁長城)은 가욕관시 중심에서 서북쪽으로 11㎞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가욕관 장성이 서쪽으로 뻗은 부분으로 가욕관 방어체제의 한 부분이라 한다.
이 성은 명나라 가정(嘉靖) 18년(1539년) 숙주병비도(肅州兵備道) 이함감(李涵監)이 쌓은 것으로 1987년 중건하였다한다. 입구에 도착해 멀리 성을 바라보니 산등성이를 따라 건설이 되었고 성벽이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보여서 현벽장성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서부팔달령(西部八達嶺) 현벽장성이란 표지판을 보고 장성위를 걸어 올라갔다. 장성의 모습이 북경에 있는 팔달령과 비슷하여 이러한 별명이 있다고 한다. 이 장성은 흑산(黑山)의 꼭대기까지 곧장 뻗어 있다. 경사가 대단히 가파른데 강충모 원장의 막내딸 주원이가 제일 앞장서서 올라간다. 아직 어려 목(木) 기운이 강해 호주(好走)하는 것 같다.

꼭대기에 오르니 망루가 3곳이 있다. 이 망루는 적정을 살피고 적이 나타났을 때 봉화를 올리던 곳이다.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횃불로 신호를 하였다(烽主晝 燧主夜) 하는데 연기를 피울 때는 반드시 이리의 똥을 사용하였다한다. 그 이유는 소똥이나 말똥은 연기가 분산되는데 반해 이리의 똥은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곧장 올라가기 때문이란다.

이를 낭연(狼烟)이라 하는데 그래서 봉화대를 낭연돈(狼烟墩)이라 하고 낭연사기(狼烟四起)라는 말은 전쟁이 일어나 사방팔방에서 봉화를 올린다는 뜻이라 한다. 날씨가 덥고 길이 가파라서 꼭대기에 오르면 땀을 많이 흘릴 것 같았는데 의외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준다.

나는 잠깐 동안 전쟁의 의미를 머릿속에 새겨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노역을 하고 삶을 바쳤겠는가. 전쟁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단순한 악(惡)인가. 아니면 문명을 창조하는 위대한 동력인가. 그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 가욕관 관성 □

현벽장성을 보고 가욕관(嘉욕關)을 보기 위해 출발했다. 가욕관은 산해관에서 시작한 만리장성이 서쪽에서 끝나는 관문으로 산해관을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부르는데 반해 가욕관은 천하웅관(天下雄關)으로 불리고 있다.
가욕관은 1372년(洪武 5년)에 처음 건설되기 시작했다. 홍무년간에 주원장은 정로대장군 풍승(馮勝)을 파견하여 원나라의 잔병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풍승대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하서주랑(河西走廊)을 공략하였다. 그는 용맹하고 지혜가 많아 감주(지금의 장액) 일대에서 원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숙주(지금의 주천)로 진군하였으며 곧장 거연해(居延海) 옥문관(玉門關)의 밖까지 진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주원장은 서북의 변방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에게 하서(河西)에 성을 쌓고 방비를 튼튼히 할 것을 명령하였다. 풍승대장군은 남쪽에는 기련산의 맥이 뻗은 문수산과 북쪽에는 마종산의 맥이 뻗은 험준한 흑산이 대치하여 천연적으로 험준함을 이루고 있는 남북 30리에 이르는 요충지인 가욕산록에 가욕관성을 쌓았던 것이다.

우리는 입구까지 걸어가기가 불편해 전병차(電甁車)를 타고 이동했다. 전병은 축전지를 말하는데 축전지를 동력으로 사용한다는 뜻인 듯하다.
성의 아래에 이르자 커다란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구안천(九眼泉)으로 사시사철 항상 맑고 푸르며 마르는 법이 없어 사람이나 말이 마실 물을 제공하고 주위의 농토에 관계용수로도 썼다고 한다. 구안천이란 맑은 샘물이 솟는 구멍이 셀 수 없이 많아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외성문 앞에서 내려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고 쓴 성문을 통해 들어갔다.
가욕관 정문의 서쪽 100m되는 큰길 남쪽에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고 쓴 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1809년 감숙진(甘肅鎭) 총병(總兵) 이정신(李廷臣)이 쓴 것이다. 이 글자는 글씨도 힘차지만 가욕관의 웅장한 기상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후세의 칭송을 받고 있다.

입구에서부터 외성문의 입구까지는 좌우에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줄기도 꼬불꼬불하고 잎도 꼬불꼬불하여 곡곡류(曲曲柳)라고 부른다고 한다.
여기에 있는 모든 성벽과 건물은 모두 명대에 건축한 것이라 한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당시 서안에서 황토를 가져와서 찹쌀밥을 지어 함께 섞어서 성벽을 만들고 활을 쏘아서 성벽에 화살이 박히면 불합격이고 화살이 박히지 않아야 합격이 되었다 한다.

내성문의 입구에 오니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가니 희대(戱台)가 있다. 희대는 청나라 때 군인들이 희극을 보던 곳이다.
희대의 천장에는 태극을 중심으로 문왕 8괘를 그려 놓았고 좌우의 벽에는 팔선을 그려 놓았다. 이 건물은 1792년에 만들어졌는데 무대 앞에 나무를 대어서 무희들의 발이 보이지 않도록 해 놓았다.

희대를 보고 오른쪽의 성문을 통해 들어가니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쌓인 옹성(瓮城)이 있다. 가욕관의 옹성은 지금 우리가 와 있는 내성 동문 밖의 동옹성과 내성 서문 밖의 서옹성 2개가 있는데 내성(內城)을 보호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옹성의 벽은 황토를 다져서 쌓은 것인데 옹(瓮)이 독옹字인 것처럼 적군이 내성을 점령하기 위해 이곳을 들어온다면 정말로 독안의 쥐가 될 것만 같다.

옹성을 지나 내성 동문으로 들어가면 성대(城臺) 위에 3층의 웅장한 건물이 서 있는데 바로 광화루(光化樓)이다. 경복궁의 정남문의 이름이 광화문이듯 광화(光化)라는 의미가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이 건물은 1506년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이를 지나 앞으로 좀 걸어가면 왼쪽에 유격장군부(遊擊將軍府)가 있는데 가욕관의 공관(公館)으로 명·청대에 가욕관의 최고 군사 책임자들은 모두 여기에 머물렀다고 한다.

건물 앞에는 2마리의 사자가 버티고 앉아 있고 좌우에는 구지장기호표도(九地藏機虎豹韜) 백영살기풍운진(百營殺氣風雲陳)이란 대련이 붙어 있다. 우리는 앞쪽의 내성 서문의 성대(城臺) 위에 있는 유원루(柔遠樓)를 바라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길의 좌우에는 모래대추나무(沙棗樹)가 심어져 있는데 열매를 먹지 못한다고 한다. 방금 지나온 광화루(光化樓)의 광화는 중화문명의 빛으로 오랑캐를 교화한다는 뜻이 있는 듯하고 앞에 있는 유원루(柔遠樓)의 유원은 먼 변방에 있는 이민족을 회유한다는 뜻이 있는 듯하다.

유원루의 밑을 지나니 다시 서옹성(西瓮城)이 있고 왼쪽의 통로를 통해 나가니 대막행(大漠行) 기념 상점이 있다. 옹성은 남쪽으로만 하나의 문이 나 있는데 동옹성문의 이름은 조양문(朝陽門)이고 서옹성문의 이름은 회극문(會極門)이라 한다.
우리는 나성(羅城)과 가욕관루를 먼저 보고나서 상점에 들르기로 하고 가욕관루를 지나 밖으로 나갔다.

가욕관성은 내성과 외성의 이중의 성벽으로 되어 있는데 내성안은 가욕관의 중심으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관내에는 창고 등이 있어 무기, 사료, 식량 등을 보관했다고 하며 사방의 성벽은 모두 640m라 한다.
외성은 동쪽, 남쪽, 북쪽의 황토로 쌓은 성벽으로 서쪽의 성벽은 외성이라 하지 않고 특별히 나성(羅城)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나성의 모습이 철출(凸出)하여 둘러싸고 있으므로 이러한 이름을 붙인 듯하다. 외성의 총 길이는 1100m라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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