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문학하기](11) “왕의 심장을 가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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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인문학하기](11) “왕의 심장을 가진 자”
  • 승인 2023.04.20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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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3-4 년 전쯤 엄청 더운 날의 기억이다. 평일 낮에 친정어머니와 콩국수를 먹으러 갔었다. 테이블 열 개 정도의 조촐한 가게인데, 안쪽으로 들어가면 좀 더 아늑한 공간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곳을 선호하곤 했다. 마침 점심치고는 이른 시간이라 우리 모녀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오붓하게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던 참에, 바로 옆 탁자에 양복 입은 중년 남자 넷이 자리를 잡았다. 여기까지는 평범하고 특별할 게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양복 입은 남자 넷은 더 안쪽에 먼저 자리 잡고 앉은 우리가 엄청 거슬리는 눈치였다. 나와 친정어머니 대각선에 마주 앉은 남자들은 각각 우리와 눈을 마주쳐도 피하는 척도 하지 않은 채 빤히 우릴 쳐다봤다. 그 와중에 자신들끼리는 대화를 했는데 대략, 그 일행 중 한 명이 부군수1)이고 우리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불편하니 알아서 좀 비켜주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식의 대놓고 하는 뒷담화였다. 그러면서 ‘부군수님, 부군수님’을 연호하다가 “왕의 심장을 가진 자”라며 또 부군수를 띄워주었다. 우리 쪽 콩국수가 더 먼저 나와서 꿋꿋이 국숫발을 집어삼키고 있는 중에도 그 중년 남자들은 우리가 국수를 먹고 있는 것조차 거슬려 견딜 수 없다는 듯 계속 쳐다보면서, “왕의 심장을 가진” 그분이 식후에 ktx를 타고 어딘가 가야 하는데 이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가를 은근히 성토했다. 명색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도시 사람인 처지라 이 상황이 황당했다. 부군수가 대체 뭐라고 저렇게 공공연하고 적나라하게 주민들을 대상으로 ‘꼰대짓’을 하고 있는지 당황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지금 본인들 하고 있는 짓이 스마트폰으로 찍혀 전 국민과 공유될 수 있다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아둔한가 싶어 어이도 없었다. 물론 소심한 일개 군민일 뿐이니, 저항이랍시고 꼿꼿하게 앉아 겨우 체할 것 같은 콩국수를 끝내 국물까지 비우고 나오면서 “부군수가 참 대단한 유세네요”라고 사장님께 비아냥거린 게 고작이었지만.

정치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인구 3만 명 규모 작은 농촌에서의 정치는 도시에서 상상하던 그런 정치와는 판이하게 굴러가는 것 같다. 특히 이 지리산 인근 지역은 1948년 10.19사건(일명 여순사건) 때 국가 권력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이 다수 살해된 집단기억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2) 그 경험을 했던 대다수 노인 세대들은 유독 공권력에 취약하고 순응적인 태도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군수든 부군수든 이 작은 세계의 알량한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조차 반대한다는 말 하는 걸 꺼려하는 식이다. 게다가 대개의 지방정치인들은 지역 내에 수십 년 묵힌 두텁고 끈끈한 사회적 연망을 갖고 있다. 지방선거 즈음이 되면 그 사람의 정책이 어떤지, 공약이 어떤지에 대한 이야기보다 “XX(군수 후보) 걔가 옛날부터 그렇게 순해 빠졌지.”라는 말이 더 회자되는 식이다. 무엇보다 따박 따박 월급 나오는 직장을 다니는 집들이 아니라면 대부분 지역에서 밥 벌어먹고 살아야 되는 이들이다 보니, 이 작은 세계에서의 이해관계에 그 알량한 권력이 미칠 파장이 결코 작지 않다. 객관적으로 볼 때야 별 것 아닌 일이더라도 당장 그것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는 온 우주만큼 중요해 보이는 일일 것이다. 콩국수집에서 만난 부군수 일행이 어이없게도 군수를 “왕”이라고 부르고, 또 부군수는 그 “왕의 심장을 가진 자”라고 지칭하는 희극은 이런 맥락에서 있을 법한 일이 되고 만다. 어쩌면 월급쟁이 전문직인 내가 아니라, 아랫마을 수박 농사지으시던 70대 어르신이 앉아계셨더라면 알아서 상석을 부군수에게 양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이곳에서는 그럴 법한 일이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뜬금없지만, 군에서는 지난 3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리산 150만㎡ 부지에 골프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벌써 골프장이 들어설 부지 21만㎡, 축구장 30개 규모의 숲이 ‘재선충 방제’를 위한답시고 모조리 잘려나갔다. 골프장이 들어서면 인근 농지는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농약으로 오염되는데, 하필 친환경 농업부지들이 주변에 위치해있으니 피해는 불 보듯 뻔해 보인다. 인근 마을 주민들은 골프장을 반대한다고 나섰지만, 소멸해가는 농촌에서 겨우 부락 하나의 주민들을 다 모아봤자 몇 명 되지도 않는다. 대신 읍내 곳곳에는 각종 단체 명의로 “골프장을 환영한다”는 현수막들이 일제히 내걸렸다. 사실 골프장이 지역 경제를 정말 살리는지도 알지 못하는 처지라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 현수막들을 보면서 오래전 국숫집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도 현수막들을 내 건 단체의 장들은 “왕의 심장을 가진 자들”이거나 그 옆에서 그를 칭송하는 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영화 <왕의 남자> 포스터. 콩국수 먹다가 이 영화가 생각나 웃음을 꾹 참았었다.

 

신유정 / 인류학 박사, 한의사

 

각주

1) 부군수는 임명직이라 계속 바뀌는데, 그날 만났던 부군수가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2) 2020년 1월 20일 법원에서 10.19 당시 군과 경찰에 의해 ‘내란’ 혐의로 살해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무죄가 72년 만에 확정되었다. 여수, 순천뿐 아니라 구례를 포함한 지리산 인근 지역들에서도 다수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현재도 희생자 신고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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