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풍택중부 – 믿음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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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풍택중부 – 믿음의 가치 
  • 승인 2023.02.17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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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
박혜원
장기한의원장

 

몸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때는 붙잡고 버틸 것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시대와 사건의 거대한 흐름에 자신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믿음이다. 그게 신에 대한 믿음이든,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든, 전문가의 조언이든,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낙관이든 결국 만사가 다 나빠질 거라는 비관이든 사람들은 각자 그것을 붙잡고 살아간다.

풍택중부는 그런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 괘다. 풍택중부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中孚 豚魚吉 利涉大川 利貞

彖曰 中孚 柔在內而剛得中 說而巽 孚乃化邦也 豚魚吉 信及豚魚也 利涉大川 乘木舟虛也 中孚以利貞 乃應乎天也

돼지와 물고기까지 믿게 만드는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왜 하필이면 돼지와 물고기일까? 우리나라에도 아직까지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물고기 역시 각 지방마다 종류는 달라도 반드시 올라가는 제수 중의 하나이다. 희생 제물로 쓰는 동물이야 여럿 있었겠지만 민간에서 가장 많이 쓸 제물이라면 분명 돼지와 물고기였을 것이다. 돼지를 집안 제사에 한 마리 정도 잡을 수 있으면 부잣집일 테고, 물고기 정도가 최선인 빈한한 집도 있을 것이다. 경제적 계층에 따라 그 믿음의 형태나 신념은 다른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정치에 대한 태도나 기대도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 계층을 전부 아우를 수 있는 믿음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럴 능력이 충분하다면 큰 내를 건너도 되는 것이다. 

初九 虞吉 有他不燕

초구는 양이 양 자리에 있고 음양이 응하는 제 짝인 육사가 있지만, 육사는 구오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위치에 있다. 밤낮도 없이 일하느라 배우자나 부모 얼굴을 볼 새가 없는 경찰, 소방, 국방, 구조대원들의 가족과 비슷한 신세인 것이다. 원망스럽겠지만 그게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한 희생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참고 견디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게 되면 편안할 수가 없다.   

九二 鳴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구이는 구오의 짝이지만 서로 음양이 응하지 않는다. 구이는 이미 좋은 벼슬을 하고 있는데 구오로서는 멀리 있는 구이가 뭘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다. 원래 벼슬을 준 취지대로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짝인 구오를 믿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다니는데 구오만 모르는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 구이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러나 실제로 보이지 않지만 어미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그 존재를 믿는 자식처럼 구이가 늘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데도 약속을 지킨 아이들이 성장한 후 더 나은 성취를 이뤘다는 연구 결과처럼 구이는 자기에게 걸린 믿음과 기대를 충족하는 데 힘을 써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六三 得敵 或鼓或罷或泣或歌

육삼에 비하면 초구와 구이는 한가롭다. 초구는 정신적으로 힘들지만 마음을 다스릴 만 하고, 구이는 힘들 것도 없이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하지만 육삼은 다르다. 현실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큰 스트레스에 놓였다.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써보다가 자포자기하기도 하고, 비관하여 울다가 낙관하며 노래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육삼이 양의 자리에 놓인 음이기 때문이다. 음양이 응하는 자기 짝인데도 육삼에게 관심이 없는 상구이기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 원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건만 모든 것이 육삼에게 참 가혹하다. 그럼 지금 육삼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내괘에서 외괘로 건너가는 그 험한 물살을, ‘큰 내를 건너가는’ 대업을 반드시 이룬다는 신념으로 건너는 수밖에 없다. 

六四 月幾望 馬匹亡 无咎

상전에는 馬匹亡 絶類上也라 했다. 자기와 같은 부류를 끊고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바로 아래에 있는 육삼을 끊고 자기 짝인 초구도 내버려 둔 채 육사는 구오에게 간다. 본래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지금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구오가 혼자서는 그 믿음을 만들어내지도 널리 퍼뜨리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수장은 따로 있지만 이 나라가 안전하다고, 질서가 잡혀있다고 느끼도록 해주는 것은 실제 치안 유지와 행정을 실행하는 실무자들의 노고 덕분이다. 해야 할 일이기에 칭송받지도 못하고 길하다는 말도 못 듣지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자리에 있는 육사는 겨우 ‘허물이 없다’는 말로 만족해야 한다. 자기의 역할에 대한 신념과 자긍심이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九五 有孚攣如 无咎

구오 혼자서는 돼지와 물고기까지 믿게 만들 수가 없다.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물고기까지 감화하는 역할을 대신 해줄 구이와 서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제 짝도 버리고 구오를 도우러 온 육사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지도자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필요하다. 그게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마찬가지다. 사람의 믿음을 얻는 것은 그 자신의 언행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사기꾼들이 대단한 사람과 연줄이 있는 것처럼 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닌가. 구이와 육사의 도움을 끌어올 때 구오는 그 믿음을 걸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허물이 없다. 

上九 翰音登于天 貞凶

날아서 하늘에 오르는 게 아니라 ‘나는 소리’가 하늘에 오른다고 했다. 실상 몸은 땅에 있을 뿐 소리만 하늘로 날아간 것이다. 나는 소리가 들린다고 나는 것과 착각하면 안 된다. 그런 잘못된 믿음은 나를 해치기도 하고 다른 이를 수렁에 빠뜨리기도 한다. 자기 짝인 육삼이 고통 속에 있는데도 상구는 허황한 생각만을 할 뿐 현실적으로 육삼을 돕지 않는다. 그런 믿음은 아무 쓸모도 없으며 도리어 해로울 뿐이다. 

무엇을 믿든, 누군가의 믿음의 대상이 되든, 나의 행동이 그 믿음의 증거가 된다. 내가 믿는 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버젓이 폐를 끼치는 행동을 정당화한다면 나의 행동으로 내가 믿는 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치료하는 환자들의 믿음이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채찍질한다. 결국 그 믿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시리아와 튀르키예를 덮친 강진에 (16일 기준)4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부상자가 9만2600명이 넘게 다쳤다. 오랜 내전으로 폭격과 총성을 겪은 시리아 사람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잔해들 사이에서 울부짖으며 기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들이 믿는 신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신의 침묵 앞에 사람들은 건물의 잔해를 들어 올려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다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헌혈을 하러 달려간다. 바로 옆의 어려운 사람을 조건 없이 도와야 한다는 신념이 사람들 사이에 있고 그게 구원이 된다. 나는 사람을 믿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사람은 귀하다는 그 믿음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를 구원하고 있다.        
        
재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시리아와 튀르키예의 조속한 복구와 부상자들의 회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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