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중지곤 – 만물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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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중지곤 – 만물의 시작과 끝
  • 승인 2022.12.23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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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장

현실적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흔히 ‘두 발을 땅 위에 붙이고 있다’는 표현을 쓴다. 땅은 그만큼 쉽게 변하지 않고 단단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땅은 부드럽고, 생명을 피워내는 역할을 하며 또한 생명이 다했을 때 그것을 품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준다. 땅은 하늘의 짝이며 서로 분별되면서도 맞닿아 있다.

땅을 의미하는 지괘가 두 개 겹쳐 있는 것을 곤(坤)이라 한다. 곤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坤 元亨 利牝馬之貞 君子有攸往 先迷 後得主利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 吉

彖曰 至哉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 坤厚載物 德合無疆 含弘光大 品物咸亨 牝馬地類 行地無疆 柔順利貞 君子攸行 先迷失道 後順得常 西南得朋 乃與類行 東北喪朋 乃終有慶 安貞之吉 應地無疆

중천건괘의 양효들은 용으로 비유되었지만 중지곤괘는 암말에 비유된다. 암말은 자식에 대한 애정이 지극히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리를 이루어 다니는 습성이 있고, 무리에 번식하는 수컷은 거의 하나뿐이지만 우두머리는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암컷인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땅의 습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닮은 동물로 암말을 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땅따먹기라는 놀이를 해본 사람이라면 ‘처음은 아득하고 뒤에는 얻는다’라는 말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처음에 욕심껏 멀리 돌을 쳐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 어렵다. 개척자들이 처음 땅을 나눌 때, 말을 타고 달려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표시하고 돌아온 곳까지가 자기 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오지 못하면 그 땅은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 땅은 내 것이 된다. 내 것이 되어야 거기서 나오는 것들과 그 위에 세울 것들이 내 것이 된다. 이로움을 주장하는 것이다.

서남은 벗을 얻고 동북은 벗을 잃는다는 것은 후천팔괘의 방위와 연관이 있다. 후천팔괘에서 서남은 곤의 자리이고, 동북은 간(艮)의 자리이다. 서남방의 곤괘 옆에는 태(兌)와 리(離)가 있고 이는 각각 소녀(少女), 중녀(中女)로 일컫는다. 동북의 간괘의 자리 옆에는 장남인 진(震)괘와 중남인 감(坎)괘가 있다. 그러니 서남쪽으로 오면 같은 여성의 성질을 가진 괘들과 함께하고, 동남쪽으로 가면 남성의 성질을 가진 괘들 사이에 있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벗을 잃는데 마침내 경사가 있다는 것은 그 음양이 어우러져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조화가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初六 履霜堅冰至

첫 서리가 내릴 때쯤의 절기는 상강(霜降)이다. 상강에서 보름이 지나면 입동(立冬)이고 겨울을 날 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당연한 순서이고 그걸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상전에는 馴致其道라는 표현이 나온다. 음(陰)은 엉겨 붙어 형태를 이루는 것이다. 수정이 이루어지면 배아가 천천히 사람의 형체를 갖추어 가듯이, 초육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자리다. 당연히 이루어질, 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비틀어지지 않고 온전한 형태로 발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초육에게 주어진 숙제다.

六二 直方大 不習無不利

땅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에게도 그 은혜를 베푼다. 씨앗은 생각이 있어 싹을 틔우지 않는다. 모든 것이 생겨먹은 대로 피어나고 자라고 먹고 싸고 되돌아간다. 여기에 무언가를 배우는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 무엇을 잘한다, 못한다고 분별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한 대로 되돌려주고 품어줄 뿐이다. 육이는 알이 부화할 때까지 품어주는 어미새와 같은 상태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어미새는 그렇게 하고 그 희생이 결국 생명으로 탄생한다.

六三 含章可貞 或從王事 無成有終

상전에는 含章可貞 以時發也 或從王事 知光大也라 하였다. 때때로 그 빛남을 드러내고 앎이 밝고 큰 사람이 이룬 것이 없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절망일까. 그러나 육삼은 군자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도 때를 잘못 만나면 자기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세상을 원망할 법도 하건만 육삼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무언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다음에야 알게 된다. 육삼은 그 先迷가 끝나는 자리다. 하염없이 가는 것을 멈추고 현실에서 싹을 틔울 방법을 찾아내는 현자의 역할을 맡은 것이 육삼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육삼이 여기서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後得은 없다.

六四 括囊 無咎無譽

육사의 자리는 主利의 시작이다. 육삼에서 말뚝을 박고 원점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면 육사는 자기가 지나온 자리에 어떤 비옥함과 가능성이 있었는지에 대해 입을 다물어야 한다. 완전히 내 것이 되기 전에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안다면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상전에는 慎不害也라고 하였다. 조심하여 해를 입지 않는 것을 중요히 여기면, 당연히 자기가 얼마나 좋은 땅을 차지했는지를 알리는 명예나 우쭐댐은 포기해야 한다.

六五 黃裳元吉

치마는 여성의 상징이고 황색은 중앙 토(土)에 배속된 색이다. 육오에 이르러 원점으로 돌아와 이제 내가 말뚝을 세워둔 곳들이 나의 영토가 되었다. 육오는 그 땅 위에서 곡식을 기르고 가축을 기르고 사람들을 먹여살리고 문명을 세우는 역할을 맡았다. 생명을 품고 기르는 땅과 어머니의 덕이 가장 크게 빛나는 자리이며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上六 龍戰于野 其血玄黃

번영하는 것에 성공한 문명은 그 자리에서 그치지 않는다. 힘센 이웃이 그 피워낸 꽃을 탐내기도 하고, 약한 이웃은 이쪽으로 흡수되기도 한다. 땅은 그대로 있어도 그 위를 덮는 세력은 서로 다투고 바뀌기를 반복한다. 기르고 품어주는 음의 도가 극에 달하면 다시 양이 시작되는 것이 주역의 이치이다. 양은 호전적이고 움직이며 팽창하는 성질을 가졌다. 건괘의 끝이 亢龍有悔였듯이, 곤괘도 누렇고 검은 피를 흘림으로서 끝난다. 모든 생물이 죽음을 맞이하여 다시 최초의 땅으로 돌아가듯이, 용과 같은 신물(神物)에게도 대자연의 섭리는 공평하다.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권세를 가졌던 왕들이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듯이, 두 대륙에 걸친 광대한 제국도 결국 역사 속에 사라졌듯이,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결국 모두가 다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用六 利永貞

건괘와 마찬가지로 곤괘에는 用이 붙은 효사가 하나 더 있다. 상육까지 이끌고 와 너른 대지를 차지하고 문명을 세웠으면 오래도록 바르게 해야 한다. 두어 평 남짓한 텃밭을 가꾸는 것과 너른 대지를 경작하는 것은 다르다. 그만큼의 수고가 더 들고 많은 사람을 잘 다루어야 하며 수확한 것을 팔거나 배분하는 것에도 공정해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래 가기 어렵다. 느리더라도 오래 가는 것은 결국 원칙이며 큰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마치려거든 그 중요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요즘 시대의 땅은 예전과 같이 변함없는 것은 아니다. 있던 산허리가 잘려 나가기도 하고, 있던 개천이 메워지기도 하며, 없던 물길이 생기고 없던 땅이 생겨나기도 한다. 사람은 땅을 지배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땅의 크기나 가치에 집착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사람이 땅 위에 그어놓은 선은 언젠가 의미가 없어진다. 이 땅보다 오래 살아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작은 네모 상자 안에 들어가 보관되다가 언젠가는 처분될 인생, 나의 시야는 어디까지였으며 내가 써온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는지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한 해의 끝자락을 붙잡고 그렇게 나를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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