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122) 생각의 고향(故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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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122) 생각의 고향(故鄕)
  • 승인 2022.10.28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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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김영호

doodis@hanmail.net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김영호 한의사
김영호 한의사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자발적인 생각도 있고,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생각도 있다. 그 생각들은 단 하나도 그냥 일어나는 법이 없다. 살아오며 겪은 경험, 그 경험에 대한 감정적 반응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저 뒤편에서 복잡 미묘한 화학반응을 일으켜 지금의 생각들을 만든다. 어쩌면 인생은 의식의 영역보다, 의식의 저 뒤편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의식의 뒤편에서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그저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나 혹은 개인적 삶 속에서 유레카의 순간이 종종 있다. 찰나의 순간에 오래 고민했던 것의 <> 혹은 <실마리>가 뇌리를 스쳐갈 때다. 대단한 학자가 아니라도 우리는 누구나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 그 순간을 잠시 미분(微分)해 보면, 고민 끝에 나온 그 답은 어디에서 왔을까? 만약 우리의 의식이 해결한 것이라면 과거의 경험과 지식만으로 짧은 기간 내에 답을 찾았어야 한다. 오랜 고민과 생각의 끝에서도 해결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의식적 영역이 해결한 것으로 보기엔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하고 나타났다는 것은 의식의 저 편에서 이미 그 문제를 해결해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의식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무의식이 여러 가지 시도를 하다가 정답을 찾았고, 그것을 우연한 계기로 발견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마치 사과가 떨어지는 순간, 의식의 저편과 연결된 문이 살짝 열리고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그래서 인류는 의식의 저편으로 다가가고자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우연이 아닌 언제든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고 수많은 시도와 노력을 기울였다. 과학적 난제 혹은 철학적 화두를 136524시간 내내 내려놓지 않으며 답을 구하기도 했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극한의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기도 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한 가지 문제와 목표에 몰두하다보면 생각은 사라지고 의식 저 편의 무한한 힘(無量大福)을 경험하게 된다.

그곳에 도달해본 경험을 잊지 못해 영성 수행자 혹은 종교인이 되기도 하고, 육체를 극한의 단계까지 밀어붙이는 고행을 택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수의 종교가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 끊어지는 곳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내 육체라는 한계가 완전히 사라진 그곳에서,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물리적 한계도 사라진다.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고, 나와 타인 나아가 모든 피조물이 연결되어 있다. 그곳을 불교에서는 佛性(自性,本性)이라고 했고 크리스트교에서는 성령의 자리라고도 했다. ‘생명의 근원’ ‘神聖’ ‘이 머무는 곳’ ‘얼나 혹은 참나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면서 다양한 종교와 철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의식의 저편을 보거나 경험하면 세계관이 바뀌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최근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날까지는 몰랐는데 어떤 날 부터는 알게 되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거든요. 우리 뇌 안의 랜덤 커넥션들이 여러 가지 시도와 조합을 해보다가 무의식 속에서 우연히 결정적인 연결이 일어난 것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우리가 의식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무의식의 결과물을 의식으로 가져오는 반복훈련인거죠. 그래서 저는 본질적인 진보는 대부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허준이 교수는 수학적 난제를 해결한 소회를 마치 종교지도자나 명상가가 최고 레벨에 도달한 후의 느낌을 설명하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얘기하고 있는 무의식의 도움도 엄청난 고민과 연구 뒤에 받을 수 있는 축복이다.

보통의 연구자라면 자신의 나이, 투자한 시간, 주변 학자들의 성과 단계 등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합리화 했을 것이다. 하지만 허준이 교수는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학부생 때부터 오래된 수학적 난제에 도전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무경계와 무한의 세계로 던져 버렸기에 주변 수학자들의 비웃음도 피할 순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고 경계를 두지 않았던 덕에 그는 세계적 석학의 반열에 올랐다. 허준이 교수가 생각하는 재능과 노력에 대한 생각, 그리고 뛰어난 직관력의 비결을 옮긴다.

대단한 결과물을 이룬 사람들이 노력을 많이 하는 건 맞는데 노력을 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고, 자신한테 고통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노력과 재능은 경계를 두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難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일상에 큰 빈칸을 두고 무의식이 그 빈 칸안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을 조언삼아, 고민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땐 <모름> 속에서 온전히 쉬어봐야겠다. <생각의 고향>에서 답을 찾을 때까지.

김영호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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