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풍산점 – 작은 것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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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풍산점 – 작은 것의 위력
  • 승인 2022.09.30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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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다. 1.01의 365승은 37.8이지만 0.99의 365승은 0.03이니 매일 아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혼자서 돌을 주워와 길고 거대한 성벽을 쌓은 사람의 이야기가 방송을 타기도 하고,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수년에 걸쳐 집을 지어낸 사람의 이야기는 그것보다 조금 더 흔하다.

이렇게 조금씩 나아간다는 의미의 漸괘는 그 과정을 흥미롭게도 여자가 시집가는 과정에 빗대었다. 풍산점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漸 女歸 吉 利貞

彖曰 漸之進也 女歸吉也 進得位 往有功也 進以正 可以正邦也 其位 剛得中也 止而巽 動不窮也

결혼은 남녀를 불문하고 인생의 큰 사건 중 하나이지만 주역이 쓰여진 시대의 결혼은 한 번 치르면 쉽게 되돌릴 수 없는 대사였다. 첩을 두는 것이 허용되고 출처(出妻), 즉 이혼을 먼저 요구할 수 있었던 남성과는 달리 여성에게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러니 서둘러 일을 벌였다가는 잘못된 짝을 만나거나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먼 곳으로 시집을 가는 혼례길을 떠났다가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 지금 어느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初六 鴻漸于干 小子厲 有言 无咎

초육은 양의 자리에 있는 음효이며 자기 짝인 육사와 음양응도 되지 않는다. 아직 뭔가를 이루기에는 힘이 없으니, 날아오르는 것은 꿈도 못 꾼다. 말하자면 아직 혼처도 정해지지 않은 어린 처자가 시집을 가보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아직 그럴 때도 아니고 상대 역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말이 나올 수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럴 수 있는 나이가 될 테고 결혼할 준비도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지니 허물은 없다.

六二 鴻漸于磐 飲食衎衎 吉

육이는 내괘의 중앙을 차지하고 음이 음 자리에 있으며 제 짝인 구오와 음양응을 이룬다. 그야말로 이 괘의 주인공이 되는 신부다. 좋은 혼처가 정해졌고 잔치를 열 준비가 되어 있다. 상전에 飮食衎衎은 不素飽也라고 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피로연을 여는 것이 아니라 검소하면서도 부족하지 않게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잔치를 여는 것은 쉽지 않은데, 육이의 결혼은 그걸 해내는 것이다.

九三 鴻漸于陸 夫征不復 婦孕不育 凶 利御寇

구삼은 양이 양 자리에 바르게 있지만 자기 짝인 상구와 음양응이 되지 않는다. 외괘인 풍이 허공이라면 내괘인 산은 뭍이다. 구삼은 내괘에서 외괘로 넘어가는 자리인데 도리어 뭍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허공에 있는 자기 짝을 버리고 대신 뭍에 있는 구오의 짝인 육이를 탐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남의 혼인을 깨뜨리는 것이고 자기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며 육이를 부정한 여자로 만들어버리는 도적질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구삼이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

六四 鴻漸于木 或得其桷 无咎

육사는 비록 자기 짝인 초육과 음양응은 되지 않아도 음효의 자리에 바르게 있다. 구삼과 구오의 두 양효 사이에서 자기 짝이 아닌 양효들을 차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는 자리지만, 육사는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킬 뿐이다. 상전에는 順以巽也라 하였다. 순하고 겸손하니 비록 짝이 맞지 않아 길하지는 않을지라도 허물은 없다.

九五 鴻漸于陵 婦三歲不孕 終莫之勝 吉

구오가 자기 짝인 육이를 만나러 가는데 구삼이 방해를 한다. 약혼은 했으나 이런저런 방해로 정작 결혼식은 하지 못하는 상태와 같다. 그러나 구삼을 자제시키고 육이와 구오가 서로 자기 짝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 결국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원하던 바를 이루게 된다.

上九 鴻漸于逵 其羽可用為儀 吉

상구는 음의 자리에 있는 양효인데다가 구삼과 서로 음양응도 되지 않는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길하다고 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상구는 그 깃이 모범을 삼을 만하다고 했다. 상전에는 其羽可用爲儀吉은 不可亂也라고 했다. 어지럽게 하지 않으니 길하다는 것이다. 구삼이 비록 음양응이 되지 않는 자기 짝이더라도 도적질을 하지 못하게 막고 뭍으로 방향을 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상구에게 달려 있다. 구삼에서처럼 혼자만 훨훨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는 구삼에게 상구가 모범을 보이고 이끌어주는 것이다.

점괘의 기러기는 높은 곳을 향한다. 그러기에 출발점이 낮은 곳보다는 높은 곳이 당연히 이롭다. 그러나 누구나 높은 곳에서 시작할 수는 없다. 물가의 기러기가 언덕처럼 높고 단단한 토대 위에 오를 때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오래 걸린다. 보통의 동물들은 크게 두 가지 경우에 번식을 한다.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고 새끼를 기르기에 적당한 환경이 마련되었을 때. 풍산점괘의 기러기 중 그 적당한 환경을 가진 것은 오직 육이와 구오 한 쌍 뿐이다.

자의로 결혼하지 않는 비혼족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제 짝을 만나기도 어렵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좋은 환경이 결혼만 하면 저절로 갖춰지는 것도 아니다. 요즘은 초육과 육사가, 구삼과 상구가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 짝을 맞춰 사는 시대도 아니다. 그나마 조건이 갖춰진 육이와 구오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성향이 맞지 않아서, 경력 단절이 걱정되어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사람들은 결혼하기를 포기한다. 위에서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보기엔 얼핏 설득도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이 이유들이 모이고 모여서 큰 결과를 낸다. 얼마 전 발표된 한국의 출생률은 0.81이었다. 소수점 한두 자리에 불과해 보이는 그 ‘아주 조금’은 한국을 심각한 인구 절벽으로 끌고 가고 있다. 그럼에도 출산율을 높이겠다고 꺼내놓은 대책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이미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를 고민해본 대목은 하나도 없고, 마치 태어나기만 하면 아이는 제 혼자 먹고 입고 배우고 자라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모범을 보일 상구’가 없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구삼이 어찌 하늘로 눈을 돌릴까. 행복한 어른이 이렇게도 부족한 나라에서 그 누가 아이를 낳고 싶을까. 기러기가 뭍으로 가고 있는데, 그 도적을 막을 방법이 없으니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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