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책으로 따라가 보는 杏林書院 100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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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책으로 따라가 보는 杏林書院 100년(2)
  • 승인 2022.08.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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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57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에서 소금을 얻는 방법은 바닷물을 솥에 넣어 끓여서 소금 결정을 얻는 자염법(煮鹽法)이었다. 소금을 만드는 것은 민간의 업이었고 나라는 염세(鹽稅)를 받았다. 일본은 한일병합 전에 이미 한반도 내 염전의 소재와 생산량을 조사했다. 천일제염(天日製鹽)이 한반도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07, 일본에 의해 인천 주안에 시험염전이 생기면서부터이다. 이 시기 한반도에는 대만염, 청국염, 일본염이 수입되어 조선 자염업은 경영 상태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일제는 제조전매를 목표로 천일염의 관영(官營) 계획을 추진하고 민간인 및 외국인이 천일염전을 축조하는 것을 금지했다. 일본인이 기술을 독점하기 위해 염업 기술 교육기관도 설치하지 않았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화학공업 원료로서의 천일염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일본의 민간기업이 천일염전 개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 민간기업의 투자성과는 초라했다. 해방이 되고 남과 북이 갈라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생산된 소금이 남쪽으로 내려올 수 없게 되자 소금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그래서 정부는 천일염전 민간개발을 허용했다.

 

염전

행파 선생은 아마 이 무렵에 고향인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내려갔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간척지 등 바다와 가까운 땅을 매입했다. 선생이 직접 염전개발 사업에 뛰어들지는 않았던 것 같고 개발업자들에게 땅을 팔았을 것이다. 거기에 고향의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을 판매하기도 했다. 소금과 관련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졌고 이 무렵에 선생의 중풍이 재발해서 이후 계속 서울에 머물렀다. 행파 선생이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거기에서 중국 상해와 당판(唐板) 의학서적 무역을 했다는 기록1)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전쟁 중이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중국의 고의서를 적()으로 맞서고 있는 나라와 무역을 했다니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1957년쯤에 염전업의 과잉투자로 경기는 급격히 하락했고 논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많았다. 행파 선생이 사두었던 땅은 나중에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부지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중풍

박병곤 선생은 함경남도 이원군 출신으로 해방 전에는 만주국에서 한약종상 허가를 받고 용정에서 개업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어 경기도 화성군으로 이주하여 경기도로부터 한약종상 면허를 받고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조암리에서 영업을 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중풍을 맞은 행파 선생을 만났다고 판단한다. 그러니까 행파 선생이 처음 중풍을 맞은 때는 1945년 이후라는 것이다. 박병곤 선생은 오래도록 이 지역에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의사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 1부와 2부를 거쳐서 195485일에 제4회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해서 한의사면허를 취득했다. 한의사가 된 후에 조암리 270번지에 인제한의원을 개설했다. 1968년에 화성군수 표창을 받았다고, 그가 1971년에 회갑을 기념하여 출간한 한방임상40의 약력에 밝혀 두었다. 이 책을 처음 발행한 곳은 행림서원이다.

 

6남매

중앙청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행림서원 2대 이성모2) 사장은, 말년에 중풍이 도져 10여년 누워 지내는 부친의, ‘월급 받아선 6남매를 못 키우니 이 사업을 해야 된다는 간곡한 충고를 따라 가업을 받았다. 이성모 사장은 책방과 집 밖에는 몰랐고 가정적이었다. 이성모 사장은 50세인 1973년에 일찍 세상을 떴다. 은행에 들어가고 싶어 대학도 경영학과를 택했던 이갑섭 사장은 부친이 갑자기 별세하자 공부도 중단하고 마음에 별 준비도 없이 잠시 경영을 맡았던 모친으로부터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인간시장

1976년에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단편집을 낸 적은 있으나 무명이었던 작가 김홍신은, 김종찬이 창립한 평민사에서 주간을 맡고 있었다. 소설 인간시장, 198012월에 주간한국을 통해서 22살의 자서전이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1년이 관례이던 연재가 5년이나 갔다. 인간시장보다 주간한국이 먼저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행림출판 이갑섭3) 사장은 연재가 진행되는 도중에 김홍신 작가에게 출판 제의를 한다. 단행본 인간시장19819월부터 행림출판에서 나왔는데 2년 뒤에 밀리언셀러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인간시장은 정비석의 자유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평가를 받는다.

 

출판은 한 방

행림출판 이갑섭 사장의 금고로 돈이 붕붕붕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였다. 마포에 사옥을 짓고, 평민사를 인수하고, 마드모아젤」 「월간주니어」 「비디오패밀리등의 잡지를 잇달아 발간했다.

나는 20094월에 이갑섭 사장을 종로5가에서 처음 만났다. 행림서원은 이미 오래전에 몰락한 상태였지만 나는 그때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80년대의 영광 속에 머문 것처럼 보였다. ‘인생은 한 방이라고 하는데 사실 출판도 한 방이다. 이갑섭 사장은 그런 한 방이 다시 그에게 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10년간, 8체질론을 공부하는 나의 특별한 동지였다. 그와 나는 8체질과 관련한 책을 여섯 권 만들었다.4) 이갑섭 사장이 큰 기대를 걸었던 일곱 번째 책 시대를 따라 떠나는 체질침 여행, 그가 201965일에 별세한 후 1020일에 출간되었고, 행림서원에서 나온 암의 일생과 함께 2020년 세종도서 학술부문에 선정되었다.

이갑섭 사장은 김홍신의 인간시장, 박양호의 흔들릴 때마다 한잔, 박범신의 물의 나라불의 나라등 대중문학 소설을 히트시켰고, 1992년에는 구자경 럭키금성회장의 자서전 오직 이길밖에 없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구전설화시리즈, 한국의 탈과 탈춤, 한국인의 놀이와 제의, 한국전쟁사시리즈, 한국의 역대 전쟁시리즈 등 의미 깊은 출판물도 많다.

 

사상의학

행파 선생은 미키 사카에 선생이 책에 쓴 것처럼 사상의학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사상의학과 관련한 출판물을 생전에 많이 내놓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1960년대가 될 때까지 사상의학을 연구하거나 진료 현장에서 활용하는 임상의가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판을 할 수 있는 기본 자료 자체가 부족했다는 뜻이다. 1950429일 한성일보에,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222-29에서 행림서원이 다시 발족(發足)한다는 광고가 있다. 여기에 들어간 책 동의사상진료의전, 소아의방, 침구경험방세 종은 이 당시 행림서원의 주력 상품인 셈이다.

 

동무 공의 초상

이현재5) 선생은 포목상인 흥일사를 경영하여 재산을 많이 모았다. 오래 고생하던 질병을 사상처방을 통해서 치료받은 후에 사상의약에 심취되어 직접 이 분야에 뛰어들어 한약종상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1945년에 사상의약보급회를 창설한다. 그는 흥일사가 있는 건물에 사상회관이라는 간판을 건다. 그리고 한국전쟁 전에 함흥을 방문하여 동무 공의 초상을 가지고 온다. 이현재 선생을 중심으로 1957430일에 사상의학회가 창립된다. 그는 매년 동무 공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신문에 기고를 할 때 이 초상을 사용했다. 수세보원판본 중에서 동무 공의 초상이 처음 들어간 것은 사상의학회가 19591216일에 행림서원을 통해 발간한 등사판 동의수세보원이다. 간기면에서 보면 당시 행림서원의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재동 112-1이다.

 

100년 기념

행림서원이 2023년이면 100년을 맞는다. 초창기에는 자성당서점(自省堂書店)6)으로 출발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행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책방의 창립일은 창업주에게도, 그리고 이후에 후손에게는 자성당서점이라는 이름까지도 특별하게 기억되지는 못했다.

행림서원이 예전의 영광을 그대로 이어서 지금까지 번창해 있었다면 초라한 처지인 내가 나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고 이갑섭 사장 그리고 이정옥 대표 두 분과 맺은 감사한 인연에 보답할 수 있는 나만의 방도를 찾으려고 했다. 특별히 지면을 할애해 준 민족의학신문사에 감사드린다.

6남매를 키우면서 행림서원의 3대를 묵묵히 지켜본 분이 있다. 행림서원 100년을 미리 기념하는 이 글을 그분의 성함을 기록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송영산7) 여사이다.

참고문헌 및 자료

1) 박병곤, 한방임상40행림출판사 1977.

2) 이중한 외, 우리출판 100현암사 2001. 12. 20.

3) 이명성, 통감부의 염업정책과 조선 염업의 변화한국외국어대학교대학원 2017. 2.

4) 류창호, 근대전환기 동아시아 제염업의 교류와 네트워크」 『한국학연구542019. 8.

5) 조손삼대를 이어온 한의서 출판 행림서원, 한의신문22242019. 8. 5.

6) 류창호, 한국 근대염업의 네트워크와 그 특성인하대학교 대학원 2020. 2.

7) 류창호, 전시체제기 조선 염업의 공업화 과정과 일본 독점자본의 침투」 『한국학연구632021. 11.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조손삼대를 이어온 한의서 출판 행림서원, 『한의신문』 2224호 2019. 8. 5.
2) 李成模(1924 ~ 1973) 
3) 李甲燮(1950 ~ 2019)
4) 『학습 8체질의학』(2009. 11.), 『학습 8체질의학 Ⅱ』(2013. 10.), 『체질맥진』(2017. 4.), 『개념 8체질』(2017. 12.), 『체질침의 새로운 처방 ZBPset』(2017. 12.), 『임상 8체질의학 Ⅲ』(2018. 3.) 
5) 李賢在(1903 ~ 1973) 
6) 새로운 자료를 찾았다. 행파 선생은 출판서적상이던 자성당서점에서 일하면서 주무(主務)를 거쳐서 주인이 되었던 것 같다. 자성당은 경운동 91번지(1925. 12. 5.), 광화문통 38번지(1927. 7. 25.)에 있었고, 1931년 10월 28일에 행림서원의 주소로 관훈동 112번지가 보인다. 안국동 157은 1932년이다.  
7) 宋榮山(1928. 12. 5. ~ 2003.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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