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정유옹의 도서비평] 한의 가족 시인 신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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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정유옹의 도서비평] 한의 가족 시인 신석정
  • 승인 2022.07.29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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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옹

정유옹

mjmedi@mjmedi.com


도서비평┃신석정 시선

기우는 해

해는 기울고요! 울든물새도 잠잣고 있습니다 탁탁 푹푹 흰 언덕에 가벼히 부드치는 푸른 물결도 잠잠 합니다 해는 기울고요! 끗업는 바닷가에 해는 기우러 짐니다 오! 내가 美術家엿드면 기우는 저해를 어엽부게 그릴 것을! 해는 기울고요! 밝언 북새만을 남기고 감니다

다정한 친구끼리 이별하듯 말업시 시름업시 가바림니다

一九二四. 四. 一九

 

신석정 지음, 권선영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출간

의사학회 학술대회 참석차 부안에 다녀온 적이 있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주변을 걸었다. 마을의 낮은 담장에 파스텔톤 벽화가 눈에 띈다. 벽화에는 그린 원고지에 시 한 편이 쓰여 있었다. 가까이 산속에서 새가 지저귀고 먼발치 바다가 보이는 그곳에서 시를 읽다 보니 푹 빠졌다. 노을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적은 시인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이 담장을 따라가면 시인의 시비와 묘소가 있다고 하여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이 시를 쓴 신석정은 ‘기우는 해’를 시작으로 1930년대 정지용, 김영랑과 함께 조선의 시 문학계를 주름잡았지만,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낙향하였다고 한다. 이후 신석정은 전주와 부안에서 줄곧 살면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를 주로 썼다고 한다. 그의 시에는 부안의 농촌 풍경과 자연이 녹아있다.

신석정을 더 알고 싶어서 『신석정 시선』을 읽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신석정의 시를 모아서 편집한 책이다. 신석정의 시를 읽어보니 단순히 목가적인 감수성뿐 아니라 저항을 느낄 수 있었다.

 

꽃덤불

태양을 의논(議論)하는 거룩한 이야기는/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1946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교과서에서 읽어 본 듯한 시다. 광복 후 1년이 지났지만 혼란했던 상황을 시로 표현하였다. 신석정의 고뇌하는 사회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해방 후에도 신석정은 서울로 상경하지 않고 전주고, 전북대, 영생대 등에서 강의하였다고 한다. 신석정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부친(辛基溫)과 조부(辛濟烈)가 유학자이면서 부안에서 한의업을 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신석정의 형(辛錫鉀)과 동생(辛錫雨)도 한의업을 하였고 그의 조카도 원광대 한의대 교수(辛祖永)까지 역임한 4대째 한의사 가족이다.

부안의 그의 묘소 앞 마을에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민관이 협치하던 동학 집강소가 있다. 원래는 신석정의 조상을 모시던 齋閣이었다고 하니 가풍을 짐작할 만하다. 시집을 읽으면서 일제강점기 권력에 굴하지 않고 모든 지위를 버리고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해방 후에도 어지러운 사회상황에서 고뇌하면서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킨 그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진료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신석정의 시를 읽고 있다. 마치 한약을 마시는 것처럼 머리가 맑아지고 부안의 넓은 논밭과 산 그리고 바다를 느낄 수 있다. 신석정은 아마도 부친으로부터 받은 의업의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시로 치료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여름날 한적한 휴양지에서 좋아하는 시를 읽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보자!

 

정유옹 / 사암침법학회, 한국전통의학史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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