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함께 읽는 동의신정(4) 칠정으로 보는 화병(火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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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함께 읽는 동의신정(4) 칠정으로 보는 화병(火病)
  • 승인 2022.06.10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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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찬영

권찬영

mjmedi@mjmedi.com


권찬영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 한방신경정신과 조교수

화병(火病)이라고 하면 흔히 관련 감정으로는 ‘분노’를 떠올리기 쉽고, 대중적으로는 화병을 ‘분노조절장애’와 가까운 상태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화병의 full name은 울화병(鬱火病)으로, 분함, 억울함, 노여움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가 일정 기간 동안 억눌려 해소되지 못하여 화의 양상으로 폭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병 발생의 원인은 분노의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억눌린 분노가 만들어낸 화병은 불안이나 우울, 사려과도와 같은 정신증상과 불면, 두통, 심계항진과 같은 신체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 즉, ‘화병=분노’라고 보는 시각은 화병의 일면 만을 보는 것으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의신경정신과학회지 33권 1호에 발표된 논문인 ‘한방병원에 입원한 화병 환자의 정서적 특성에 대한 핵심칠정척도 단축형을 활용한 후향적 관찰연구’는 비록 소규모 연구이긴 하지만,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주연, 강동훈, 강형원, 정인철. 한방병원에 입원한 화병 환자의 정서적 특성에 대한 핵심칠정척도 단축형을 활용한 후향적 관찰연구. 동의신경정신과학회지. 2022;33(1):1-19.
김주연, 강동훈, 강형원, 정인철. 한방병원에 입원한 화병 환자의 정서적 특성에 대한 핵심칠정척도 단축형을 활용한 후향적 관찰연구. 동의신경정신과학회지. 2022;33(1):1-19.

 

이 연구는 화병 Structure Clinical Interview for DSM-IV를 사용하여 화병으로 진단된 입원환자 15명(평균 연령: 59세, 여성 13명)을 대상으로, 입·퇴원시에 핵심칠정척도 단축형(CSEI-S), 화병 척도, 화병변증도구, 간이정신진단검사 II(KSCL-95) 등을 사용하여 이들의 정서적 특성을 확인하고자 한 후향적 관찰연구이다.

여기서 참고로 CSEI-S의 설명을 하자면, 이 도구는 표준화된 자기보고식 설문검사로 칠정을 측정하기 위해 개발된 핵심칠정척도(CSEI)의 단축형으로, 지난 일주일 동안의 기분 상태를 기준으로 희노사우비공경의 칠정을 각각 4개의 문항 씩 1-5점 리커트 척도 평가를 시행한다.

*CSEI에서 평가하는 각 칠정의 조작적 정의

희(喜): 즐거움

노(怒): 분함 또는 억울함

사(思): 과도한 생각과 고민

우(憂): 우울한 정서

비(悲): 절망감과 우울의 행동

공(恐): 두려움과 회피 및 사회불안

경(驚): 깜짝 놀람, 두근거림, 안절부절 못함

분석 결과, 화병 환자들의 입원 시 평가에서 희노사우비공경 간의 수치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일정한 경향성을 보였는데, 모든 연령대(20-30대, 40-50대, 60-70대)에서 비(悲)와 사(思)가 상위 3개 칠정에 속하였고, 증상 지속기간에 따른 분석에서도 환자들의 증상 지속기간에 관계없이 이 비(悲)와 사(思)의 점수가 가장 높았다. 반면, 노(怒) 수준이 가장 높았던 20-30대 화병 환자의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 연령대에서도, 전체적으로도 노(怒) 수준은 다른 칠정들에 비해 가장 적은 편이었다.

즉, 젊은 연령대의 화병 환자에서 노(怒) 수준이 높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화병 환자에서 노(怒)의 수준보다 비(悲)와 사(思) 수준이 높아져 있는 것이 일관적으로 관찰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퇴원 시점(한방 입원치료 후)의 평가 결과, 칠정 중, 비(悲)와 사(思) 수준만 통계적으로 유의한 감소된 것이 관찰되었다.

화병 환자에서 칠정 중, 비(悲)와 사(思)가 높은 수준을 보이고, 노(怒)는 일반적으로 적은 수준을 보였다는 연구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연구진은 이를 “임상적으로는 노(怒)가 적게 드러나고 스트레스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반응을 비(悲)로 표현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라고 고찰하고 있다.

필자의 임상 경험에서도 화병은 억눌린 분노로 인해 발생하지만, 성격적인 특성이나 외부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분노의 표현이 좌절되다보면 들끓는 분노를 느끼는 것보다는, 신체증상(신체화 증상)이나 좌절감, 억울함, 한스러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 화병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한국한의약진흥원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개발사업단. 2021.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 화병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한국한의약진흥원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개발사업단. 2021.

이를 ‘화병에 대한 통합적 모델’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부당한 사건, 충격에 대하여 (1) 적극적인 반응을 시도했으나 전략이 실패한 급성기에는 노(怒)가 강하게 남아있는 반면, (2) 소극적 반응·회피를 보이거나, (3) 좌절·포기를 한 경우에는 그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반추(사(思))와 함께 좌절감, 절망감(비(悲))을 더 크게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보통 고전적인 의미의 화병이 발생하는 경우는 적극적으로 부당한 사건에 대하여 반응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경우보다는, 소극적으로 반응 및 회피하였거나, 좌절·포기로 인해 분노 정서가 억제되어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위 연구에서 노(怒) 수준이 가장 높았던 20-30대 화병 환자의 경우처럼, 최근의 젊은 세대의 화병은 적극적으로 반응을 하고자 했으나,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실패하고 노(怒)를 위주로 호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번에 살펴본 연구는 대조군이 없고, 적은 수의 화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로서, 일반화하여 해석하는 것에 한계점이 있지만, 이 연구에서 관찰된 결과는 화병에 대하여 우리의 이해를 높이는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또, 현재 경희대학교 한방신경정신과 교실 및 한의학정신건강센터의 주관으로 시행되고 있는 대규모 전향적 관찰연구에서는 화병과 우울장애, 불안장애 등 다양한 정신장애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자 하는 한방신경정신과 기반 다기관 연구를 시행하고 있으므로, 향후 화병에 대한 이해를 더 넓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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