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강솔의 도서비평]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순간마다, 나 스스로와 연대하며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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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강솔의 도서비평]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순간마다, 나 스스로와 연대하며 살기
  • 승인 2022.05.27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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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솔

강솔

mjmedi@mjmedi.com


도서비평┃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 됐다

이 책은 마흔 두 살의 끝자락에 유방암을 선고 받고, 선항암치료를 거쳐 유방 절제술, 방사선치료를 거쳐 현재 투병중인 한겨레신문사 양선아 기자님의 글이다.

책을 펼쳐서 목차를 읽었다. 2부의 제목이 <그럴 땐 바람이 부는 대로 나뒀다>, 3부는 <내가 나와 단란히 살기 위해>였다. 목차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양선아 지음, 한겨레 출간

사실 추천사를 쓰신, 이명수 선생님이 아니셨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추천사와, 한의원 대기실에 비치하고 환자들에게 읽게 하면 좋겠다는 말씀에 저도 한 권 부탁합니다 하고 받은 책이었다. 책을 받았으니 읽기 시작했고, 아주, 아주 오랜만에(최근 독서력은 거의 땅 파고 지하실로 들어간 상태라서)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단숨에 읽었다.

양선아 기자님께서 살아왔던 방식이 나는 참 익숙했다. 밖에서 나를 보면, 특별할 것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동네 한의사라고 생각할 텐데, 나의 내면은 인생의 대부분을 바람이 부는 대로 놔두지 못하고 살았다. 늘 더 성장하고 싶다고,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더 실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기적인 사람으로 살지 않기 위해 채찍질하고 노력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놔두는 것이 휩쓸려가는 것이고 비겁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요즘에서야 어렴풋이 바람이 부는 대로 놔두기도 하는 것이, 삶에서 진정 용기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슬쩍 들곤 했는데. 바람과 파도의 높낮이와 흐름을 타는 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라는 마음이 스며들곤 했는데. 지금껏 애쓰고 살아왔던 나를 토닥여주곤 했는데... 이 책은 유방암을 <위험한 기회>로 받아들인 작가가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 같은 책이었다.

이 책의 미덕은 차근차근하다는 데 있다. 뜻밖의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하는 과정도 차근차근하게, 과정 중에서 무너지는 마음과 불안과 두려움도 차근차근하게, 투병생활에 힘이 되었던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들도 차근차근하게, 그 와중에 읽었던 책이나 글귀도 차근차근하게 이야기한다. 차근차근하게 이야기 하는 와중에 마음은 따뜻해지기도 하고 같이 무너지기도 하고, 기적이란 없는 순간에 속상해하기도 하면서, 그 다음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의 기록이다.

암이 아닐 수도 있거나, 항암치료해도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을 수도 있거나, 유방을 전절제가 아니고 부분절제 할 수도 있거나 <나에겐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들이 있지만 삶에서 그런 기대들이 충족되지 않는 순간. 그 순간의 기록들.

그래서 끝장 난 줄 알았는데 -때로는 좋은 것으로 끝장 난 줄 알았을 때조차- 인생은 계속 된다. 결국 성장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들을 겪으면서 나에게 맞는 선택들을 찾는 것. 그럴 때에 나를 위해 어떤 것이 가장 나다운 선택인가를 깨닫는 과정. 그것이 성장이 아닐까. 더 멀리 더 높이 가기 위해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말한다. 세상과 연대하기 전에 나 자신과 연대하자고. 자신에게 깊은 연민과, 선한 우정으로 자기 자신과 연대하는 삶을 살자고. 나와 연대하고 힘 빼고 살기.... 라는 구절에 공감하였다.

한의사로써의 삶도 그렇다. 한의원에 오래 오시던 환자분이 계셨다. 20년 전 대장암 발병 후 꾸준히 관리하며 잘 지내셨고, 우리 동네로 이사 오시며 왕뜸을 뜨고 싶다고 한의원에 오셨다. 최근 3-4년 사이에 재발하시면서 기존 항암제가 듣지 않아서 임상시험용 항암제를 사용하였고 부작용으로 시달리면서도 단정하고 긍정적인 환자분이셨다. 복수가 차오르거나, 식사를 못하거나, 그 와중에 구안와사가 왔을때도 한의원을 찾으셨는데 나는 늘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해드릴 것이 별로 없었다. 한의원이 이사할 때 본인이 새집으로 이사하는 듯 기뻐하셨던 분이셨는데,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전화하셔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하셨다. 돌아가신후 딸과 남편이 함께 찾아오셔서 같이 울었다. 한동안 그 환자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났다. 나는 치료를 위해 무엇도 해주지 못했다. 투병 과정을 듣고, 뜸뜨고 침 맞으러 오시던 시간을 함께 했을 뿐이었다. 오늘부터 그 분이 떠오를 때,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던 무기력한 나를 탓하기보다, 그 분 곁에 같이 있었던 나를 토닥여주기로 했다.

이 책을 한의원 대기실에 두어야겠다. 우리 한의원에 오시는 암 환자분들에게 내가 해 줄 것이 별로 없다는 마음에 늘 괴로운데, 이 책을 놓아두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통의 과정에 옆에 있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부축’일 것이다. 내가 나와 연대하고, 환우가 환우 스스로와 연대하며 함께, 그 시간을 걸어가는 것.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순간마다, 내 마음을 실어서 함께 하기. 그것을 동네 한의원에서 하라고 이 책을 읽게 되었나보다.

 

강솔 / 소나무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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