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택천쾌 - 결단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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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택천쾌 - 결단의 주역
  • 승인 2021.10.0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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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장

요즘 뉴스에 ‘화천대유’와 ‘천화동인’이 연일 오르내린다. 주역에 관심이 많은 사람 중 하나로서, 사람들이 그 괘의 이름에 익숙해지는 것이 약간은 서글프다. 두 괘는 모두 크게 가진 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과 여럿이 모여 세상을 이롭게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이름이 붙은 회사에서 여럿이 모여 한 짓은 그저 눈먼 돈으로 자기 잇속을 채운 것 뿐이다.

주역에는 화천대유와 천화동인처럼 음효 하나, 양효 다섯개로 이루어진 괘가 네 개 더 있다. 하나 있는 음효가 1효이면 천풍구, 2효이면 천화동인, 3효이면 천택리, 4효이면 풍천소축, 5효이면 화천대유, 6효이면 택천쾌이다. 순서상 화천대유는 14번째 괘, 택천쾌 괘는 43번째 괘이지만 화천대유의 5효에서 한자리 더 올라간 음효가 어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는 의미에서 오늘은 택천쾌 괘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택천쾌 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夬 揚于王庭 孚號有厲 告自邑 不利卽戎 利有攸往

彖曰 夬決也 剛決柔也 健而說 決而和 揚于王庭 柔乘五剛也 孚號有厲 其危乃光也 告自邑不利卽戎 所尙乃窮也 利有攸往 剛長乃終也

 

쾌괘의 상황은 아무래도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 같다. 그 와중에 왕정과 읍이 등장한다. 어느 고을에서부터 호소가 들어오는데, 그것을 해결해주는 무대는 왕정이다. 군사를 일으켜서 그 고을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심지어 그 호소가 매우 미더운 것이더라도 위태로움이 있다고 한다. 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그럴까? 일단 초효를 보자.

 

初九 壯于前趾 往不勝爲咎

 

양기는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니 가장 아래 깔려 있는 초구도 기운이 넘쳐 흔들흔들 한다. 괘사에서 말한 읍이 초구의 위치라고 한다면, 자신의 고을에 생긴 부당한 일에 분연히 떨쳐 일어난 사람들이 초구이다. 그러나 아무리 억울한 사연도 묻혀버리는 일이 있는 것이 사회다. 정부나 언론이 고의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묵살하면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은 아예 모르고 지나가거나, 이익을 노리고 분탕을 치는 사람들로 치부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만 앞서 떨쳐 일어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九二 惕號 莫夜有戎勿恤

 

고을 밖을 군사가 에워싸고 있는데 어두워지면 언제 당할지 모른다. 두렵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왜일까? 상전에는 有戎勿恤 得中道也라 했다. 중도를 얻었기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명분이 있어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다. 폭력 앞에서는 명분 따위는 쉽게 힘을 잃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저항이 올바름을 호소하는 것은 그 올바름이 다른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연대가 가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집단 이기주의에서 시작한 투쟁은 결국 소수의 누군가만 배를 불리고 재빠르게 손을 터는 것으로 끝이 난다. 대다수의 상처나고 다친 사람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 조롱과 멸시만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구이의 상황은 다르다. 올바른 명분 위에서 위험을 널리 알리고 있으니 많은 이들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비록 폭력으로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 역시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九三 壯于頄有凶 獨行遇雨 君子夬夬 若濡 有慍 无咎

 

구삼은 유일하게 음양응이 되는 자기 짝이 있는 효이다. 그러나 구삼의 상태는 그닥 좋아 보이지 않는다. 혼자 길을 나선 것도 모자라 비까지 맞아 쫄딱 젖어버린 모양새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사람들은 누구나 쉬운 길을 찾는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가거나, 떠나온 집이 가깝다면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구삼은 양의 자리에 있는 양효로 군자이다. 그가 홀로 떠나온 이유가 있기에 온 몸이 다 젖어버리는 흉을 당하더라도 그는 되돌아가지 않는다. 구삼이 떠나는 것은 다름 아닌 상육이다. 음양응을 이루는 제 짝이지만 상육이 하는 짓은 올바르지 못하다. 상육을 떠남으로써 상육은 구삼을 비난하고, 구삼이 상육과 한패라고 여기는 다른 이들은 구삼을 욕하겠지만,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 이를 감수하는 구삼을 끝내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결국 허물이 없어진다.

 

九四 臀无膚 其行次且 牽羊悔亡 聞言不信

 

상전에는 其行次且 位不當也 聞言不信 聰不明也라 하였다. 행함을 머뭇거리는 것은 자리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고, 말을 듣더라도 믿지 않는 것은 지혜로움이 밝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사는 음의 자리에 있는 양효이니 자리가 마땅하지 않다. 게다가 자기 짝인 초구와 음양응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어쨌든 구사는 구오와 가까운 위치에 있다. 저 멀리 고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듣고 구오에게 전할 수 있는 위치라는 뜻이다. 끌고가야 하는 양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초구라고 생각한다. 양은 고집이 세며 주변을 살피지 않고 앞으로 돌진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종종 나무나 울타리를 들이받아 거기 뿔이 끼는 바람에 그대로 굶어죽는 양도 있다. 앞꿈치에 굳세다는 평가를 들은 초구가 딱 그런 양이다. 그 양이 방향 분간도 못하고 뛰쳐나가기 전에, 짝인 구사는 그 양을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야한다. 고을에서 벌어지는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산 증인으로서의 초구를 끌고 구오에게 가서 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텐데, 말을 들어도 믿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구사는 결국 일을 키우게 된다.

 

九五 莧陸夬夬 中行无咎

 

구오는 양이 양자리에 바르게 있다. 그러니 결단을 내리고 처단할 힘이 있다. 그런데 중도를 행해도 허물이 없는 정도다. 왜일까? 상전에는 中行无咎 中未光也라 했다. 중도를 행함에 허물이 없는것은 그 중도가 빛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구이를 두렵게 했던 군사를 다름아닌 구오가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육을 처단하는 주체도 구오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쪽 말만 듣고 한쪽만을 처단한 것이 아니라, 양쪽 말을 듣고 양쪽 모두에 손을 쓴 것이다. 중도를 지켰음은 확실하나, 중도라고 하여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한쪽은 힘없는 고을 사람들일 뿐이고 다른 한쪽은 지금껏 가장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누린 소인배이다. 그런데 양쪽 모두를 위협하는 결정을 내린 것은 공평할 수는 있으나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니 중도를 행했고 상육을 처단하는 큰 결단을 내렸어도 허물이 없는 것에 그칠 수 밖에 없다.

 

上六 无號 終有凶

 

상육의 상황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모두가 상육이 저지른 악행을 알고 있고 부인할 수조차 없이 증거가 있다. 상전에는 无號之凶 終不可長也라고 했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 잘못을 많이 저지를수록, 부당하게 이득을 본 금액이 클수록, 빠르게 발각될 가능성이 높다. 이득에 눈이 멀어 위쪽만 보며 살았던 상육은 자기를 처단하려는 양효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지 알지 못했다. 차라리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았으면 그동안 모은 것을 가지고 평생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육은 가장 꼭대기 자리에 있다. 모두가 그를 주목하는데, 그의 과오 역시 그 자리의 장식처럼 흉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화천대유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회사는 어떻게 그렇게 큰 수익을 남겼을까.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싼 값에 땅을 사서, 비싸게 팔면 된다. 싼 값에 땅을 팔았던 사람이 억울하다고 해도 대부분은 그저 운으로 치부한다. 안 팔고 갖고 있었으면 비싸게 팔 수 있었는데, 그때 헐값에 팔아넘긴 건 바로 당신이지 않느냐, 이 모든게 운인데 어디서 누구를 원망하느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운은 모두가 앞날을 모를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불보듯 뻔한 결과를 이미 알고 그것을 향해 실행에 옮기는 사람과, 한치 앞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 놓은 사람이 같은 출발선 위에 있다고 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한쪽이 다른 한쪽의 것을 빼앗아 오는 과정에서 그런 불공정이 있음을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된다. 이런 일이 어디 대장동 개발 사업에서만 있는 일일까. 도처에 그런 일들이 널렸다. 정보를 틀어쥐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제 멋대로 이익을 만들어 굴리는 일이 어디 이것 뿐일까. 그러나 억울한 자의 호소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이고, 이걸 끌어다 전해줘야 하는 구사와 같은 언론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입을 다물고 있다. 결단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중도가 무엇인지도 헷갈리는 것 같고, 듣는 사람들은 모두 듣고 헤아리고 믿는 지혜가 부족하다. 모든 증거가 어떤 소인배를 가리키는데도 불구하고 결단과 처단은 아득히 멀다. 화천대유 괘의 진정한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화천대유의 뜻이 굳어지는 것처럼, 택천쾌의 결단 역시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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