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 작은 銅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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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 작은 銅版
  • 승인 2021.10.0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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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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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36

이진윤

선원파승(璿源派乘)은 동무 공 가문의 족보로서 1917년 1월에 함흥에서 간행된 것인데, 동무 공의 이복동생 이섭증의 손자인 이진윤(1894~1961) 선생이 편집겸교정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하니 이진윤 선생은 가문의 정보에 밝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이진윤 선생이 별세한 후, 홍순용(1909~1992) 선생이 1964년에 발표한 「동무 이제마전」을 집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2000년 9월에 이진윤 선생의 아들인 이성수(1926~ ) 옹이, 부친이 남긴 〈함산사촌 동의수세보원 갑오구본〉을 공개하였다. 이 날 이후에, 동무 공 추모사업위원장이던 이경성은 이성수 옹을 몇 차례 더 만났다. 그러던 중에 사진을 한 장 받았다. 동무 공의 초상이 있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초상 옆에 가필이 있었다. 이성수 옹이 전하기를 1920~30년대에 율동계 계원들이 협의를 하여 동무 공의 초상을 제작했다는 이야기를 부친께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이경성은 이 사진을 복사해서 사상체질의학회 회원들에게 나눠주고, 또 스캔을 해서 디지털 파일로 만들었다. 가필된 부분을 포토샵으로 제거한 다른 파일도 만들었다. 이경성은 2010년에 『사상체질의학회 40년사』 편집작업을 할 때, 각 장을 나누는 페이지마다 이 사진을 넣었다.

 

가필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李東武 先生 肖像 燮雲 字 懋平 號 東武 諱 濟馬 字 子明

別選武科官 武衛別選軍官 守門將軍 武威將軍 鎭海縣監兼兵馬節度使 丙申 正三品 通政大夫 宣喩委員 丁酉 正三品 通政大夫 高原郡守 四象醫學 東醫壽世保元 格致藁 東武儒略

이 내용은 선원파승에서 동무 공의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그러니 이 내용을 사진에 적어 넣은 사람은 사진의 소유주였던 이진윤 선생 자신이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이것은 나의 추리이다. 이진윤 선생이 ‘1920~30년대에 율동계에서 동무 공의 초상을 제작했다’고 아들에게 전한 것은, 선생이 이 그림을 접했을 때 받은 단순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진윤 선생이 율동계가 제작한 그림을 직접 보았다거나, 그림을 카메라로 직접 찍었다면 ‘가필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세보원〉 판본에 실린 동무 공 초상에서 그림과 초상의 제목인 ‘이동무 선생 초상’은 분리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제목은 그림이 완성된 시기 이후에 붙은 것이다. 그리고 이진윤 선생이 소장한 사진에 가필된 내용이 들어간 시기는, 이 초상의 제목이 ‘이동무 선생 초상’으로 된 후의 일이다. 가필한 사람은 초상에 원래 들어갔던 문장의 내용이 미흡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동무 선생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이진윤 선생은 1959년 12월에 나온 사상의학회판 〈수세보원〉을 받아 보았다고 짐작한다. 그리고 어느날 책의 초상이 있는 부분에 글을 적어 넣었다. 그러다 어떤 필요에 의해 초상이 있는 부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이성수 옹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초상

1970년 5월 27일에 출범한 대한사상의학회에서 홍순용 회장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은 『동의수세보원』의 번역이다. 1971년 8월에 열린 정기총회에서 번역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기로 하고, 홍순용 이을호 송병기 송일병 박석언의 5인으로 번역위원회를 꾸려 업무를 분담하여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위원회의 활동은 순조롭지 않았고, 결국은 이을호 홍순용 두 사람이 완성을 하게 된다.

 이을호(1910~1998) 홍순용 선생이 함께 역술(譯述)하여 1973년 10월 15일에 수문사에서 초판을 발행한 『사상의학원론』은 히트작이다. 학계의 반향은 뜨거웠다. 이 내용을 표절한 문고판이 나올 정도였다. 1976년에 이갑섭 사장의 행림출판사가 판권을 이어받아 재판을 찍었고 이후에도 여러 번 중판(重版)되었다. 수문사 판부터 서문의 앞 장에 동무 공의 초상이 실려 있다. 뒷면에는 향부자팔물탕 처방전과 7판본 사진이 아래위로 배열되어 있다.

 

김남일 교수의 연구실에서 본 동판을, 처음에는 『사상의학원론』에 들어간 초상을 찍은 부식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글을 준비하면서 수문사판과 행림출판사판, 행림출판 판을 모두 확인해 보니 이 책에 들어간 초상 사진은 원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저 동판으로 직접 인쇄한 것이 아니라 어느 다른 곳에 있는 사진을 가져온 것이다. 동판에 들어 있는 그림은 도포의 소매부분까지 길게 있는데, 『사상의학원론』에 들어간 초상은 가슴 부위에서 잘려 있다. 그리고 동판 원본보다는 사진이 가로도 약간 펼쳐진 듯한 모양이다.

그리고 인쇄된 사진의 테두리가 정확한 사각형이 아니다. 한 학회가 역량을 모아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고, 그런 결과로 완성된 책의 제일 앞 장에 넣은 사진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무 이제마 공의 초상이다. 너무 허술하지 않은가. 드러나지 않은 사연이 분명이 있을 것이다. 호기심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저 동판으로 인쇄한 다른 책이 있다는 것이 된다. 동판은 5.2×7cm로 명함판 사진 크기다. 이것은 노정우 선생의 유품이니 국립중앙도서관에서 1973년 10월 이전에 나온 선생의 저작을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그 책들 속에 사상의학 내용이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네 권이 추려졌다.

『인물한국사 Vol.4』 1965. 박우사 p.283~297 이제마 사상의학의 계시자

『현대인의 한방 : 알기 쉬운 한방사전』 민음사 1968. p.254~263 사상의학

『백만인의 한의학』 고문사 1971. p.170 사상의학

『한국인물대계 Vol.6』 1972. 박우사 p.261~274 사상의학의 계시

『백만인의 한의학』은 『현대인의 한방』을 제목을 바꾸고 약간의 편집을 한 후 재발행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다. 『인물한국사』와 『한국인물대계』는 인물백과 같은 형식의 책이니 여기에 이제마 공의 초상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래서 두 책의 해당 부분을 국립중앙도서관에 우편복사 신청(8월 27일)을 했다.

 

노정우 선생

동판이 궁금하기도 해서 김남일 교수에게 연구실로 가겠다고 전화를 하고 약속을 잡았다. 8월 29일 11시에 경희대에 도착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모교는 한산했다. 김 교수는 노정우(1918~2008) 선생의 유품 중에서 개인사가 정리되어 있는 파일 뭉치 세 개를 보여주었다. 놀라웠다. 선생은 자신이 걸어간 행적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치열했던 삶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자료였다. 조금이라도 누락이 된다면 마치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그렇게 모아진 것들이다. 다른 쪽에 있는 박스 안에는 매체를 위해 썼던 원고지 묶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보통 책이나 매체를 위해 쓴 원고는 일부러 챙기지 않는다면 없어지기 마련이다.

연구실 서가에 얹어진 책 더미에서 『인물한국사』가 눈에 띄었다. 내가 찾아보고 싶은 Vol.4가 아니고 허준 선생이 수록된 Vol.3였다. 내용을 펼쳐보고 내가 헛짚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책에 수록된 인물에 사진이나 초상이 들어간 경우는 없었다. 『한국인물대계』도 그런 형식의 책이 아닐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동판이 쓰인 책을 찾는 일은 아주 어렵게 된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보낸 복사물이 도착했다. 『인물한국사』와 『한국인물대계』는 같은 내용이었고, 예상처럼 동무 공의 초상은 없었다.

김남일 교수는 내게 노정우 선생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 연구해 볼 것을 권했다. 특히 사상의학 분야에서 본 평가가 필요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동안 학계에서 그런 연구와 작업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노정우 선생은 1996년 12월 6일에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제마의 달 기념행사 및 학술세미나에서, 이 해에 처음 제정된 「이제마 상」의 첫 수상자였다. 나는 노정우 선생이 사상학계에서 어떤 업적이 있었는지 늘 궁금했는데 적극적으로 그걸 해결해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선생이 미국에 오래 계셔서 그런지 연구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빈도도 적었다. 노정우 선생은 8체질의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8체질의학의 창시자인 권도원 선생이 한의사가 되도록 이끈 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운(運)에서 꼭 필요한 인물과 사건은 딱 알맞은 시기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거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마치 그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동판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다면 나는 노정우 선생에 대한 관심을 금방 거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무 이제마 공의 동판이 나를 계속 노정우 선생 쪽으로 당겨서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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