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 以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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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 以文社
  • 승인 2021.08.28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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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33

〈동의수세보원 갑오본〉

한민갑은 1899년 1월 12일에 정평에서 태어났고, 1950년 1월 24일에 대전에서 별세했다. 한경석은 2001년에 『사상체질의학회지』에 발표한 「동의수세보원 갑오본의 서지학적 연구」를 통해서 한민갑의 생애를 간략하게 보고하였다. 한경석은 청주한씨 족보를 중심으로 수소문하여, 원주에 거주하는 한민갑의 작은 아들인 한치문(1927~ )을 찾아서 인터뷰를 진행했던 것이다. 논문 중에 한민갑이 “1946년에 월남하여 계룡산 근처에 정착하여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가끔 대전 익문사에서 활판의 글을 썼다.”는 내용이 있다.

 

정평 사람 한민갑은 1940년 7월에 함산 사촌에서 〈동의수세보원 갑오본〉을 초록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1940년 12월에는 대전부 석남촌에서 〈동의수세보원 구본〉으로 정서했다. 갑오본의 초록은, 한두정 선생이 주도한 〈수세보원〉의 7판본인 『상교현토 동의수세보원』의 출판과 연계된 작업이었다고 나는 짐작한다. 그리고 7판본이 1940년 12월부터 대전의 이문사에서 인쇄되었으므로, 한민갑은 아마 7판본의 인쇄와 관련하여 대전에 가서 일정 기간 머물렀다고 추정된다.

  사실 (최소한 1940년 7월까지는 이진현의 집에 있었던) 동무 공이 직접 쓴 《갑오구본》이 지금까지 남아서 공개되었다면 이 두 초록본은 그리 가치 있는 서물은 아니다. 하지만 《갑오구본》이 나타나지 않은 현실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체품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석인본

한두정 선생은 『명선록』과 『격치고』를 함흥에서 연활자(鉛活字)로 찍었다. 두 책을 인쇄한 곳은 함흥의 덕흥인쇄소이다. 그런데 『상교현토 동의수세보원』은 활자본이 아니고 석인본(石印本)이다. 그리고 인쇄한 곳은 함흥이 아닌 대전에 있는 이문사(以文社)였다. 1900년대 전반기에 초판부터 7판까지 이루어진 〈수세보원〉의 출판활동 중에서도, 활자본이 아닌 것은 7판본인 『상교현토 동의수세보원』이 유일하다.

석인본은 석판으로 인쇄한 판본이란 뜻이다. 석판인쇄법은 인쇄면이 볼록(凸)하거나 오목(凹)하지 않은 평판형의 일종으로 1798년에 독일의 A.제네펠더가 발명하였다. 판면으로부터 한번 유연한 고무 블랭킷의 표면에 잉크를 옮기고, 거기에서 지면에 인쇄하는 오프셋인쇄방식은 석판인쇄법이 발전한 것이다. 종이로의 평판 오프셋인쇄기는 1904년에 미국의 아이라 루벨(1846~1908)에 의해 우연히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동식의 인쇄기에서는 1분간 20매 정도의 생산능력을 보였지만, 평판재가 석판재에서 아연판이나 알루미늄판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되어 원통형의 판통을 가진 윤전인쇄기로 발전했다.

일본에서도 1920년대에는 나카시마기계공장이나 하마다인쇄기제조소, 고모리기계제작소 등에서 일본산 인쇄기가 제작되었다.

 

고성 이씨 가문

돈재 이학희(1845~1927)는 평안북도 삭주에서 태어났다. 신축년(1901)에 혜민원 참서로 행정부에서 일했다. 경술국치 전후 궁내의 상황을 기록한 병신일기(丙申日記)를 남겼다. 이후에 낙향하여 가솔을 이끌고 경북 예천을 거쳐서 충청남도 계룡산 아래 봉림동(신도안)으로 이주하였다. 간재 전우, 병암 김준영과 교유하였다. 후손은 모암 이인구(1890~1952), 동초 이기복(1907~1957) 이기선, 모운 이석희(1927~1994) 이석환 이석건으로 이어졌다. 이 가문은 논산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아울러 인쇄소를 경영하였다.

간재 전우의 문인인 모암 이인구가 심혈을 기울여 판각(板刻)한 간재선생문집(艮齋先生文集) 용동본(龍洞本)의 판목(板木)을 1989년 12월에 대전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고, 가문에서 보관하던 고서 2,598책과 고문서 4,109점을 후손들이 1999년과 2019년에 충남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여, 모운문고(慕雲文庫)가 설치(1999년)되었다.

 

이문사

모운 이석희의 차남으로 중부대학교 정보보호학과에 재직 중인 이병천(1964~ )은 자신의 가문 이야기를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있다.

증조부인 이인구와 조부인 이기복이 함께 대전역 앞에서 운영하던 이문사는 한국전쟁 중에는 신도안에서 피난을 했다. 1950년대에 두 분이 별세한 후에는 이석희는 이문사 인쇄기를 신도안으로 가져와서 인쇄 일을 이어서 했고, 아우인 이석환은 대전도청 앞에 이문사 인쇄소를 새로 차렸다고 한다. 이인구는 주로 대외활동을 했고, 이문사에서 찍었던 석인본의 많은 글씨를 명필 소리를 듣던 이기복이 썼다고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다. 일이 바쁠 때는 글씨를 다른 사람이 쓰기도 했다는 것이다.

내가 글씨를 누가 썼는지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열을 올리자, 이병천 교수는 ‘글씨를 누가 썼는지 찾아내는 게 자기로서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면서, 글씨체가 그만큼 중요하다면 숙부를 찾아뵙고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할 것 같다’고 내게 권했다.

석인본의 글씨는 활자본의 활자와 격이 같다. 그렇다. 글씨는 사소할 수도 있다. 요점은 책의 실지 내용이지 글씨는 아니지만, 보문산 아래에 살고 계신다는 이병천 교수의 숙부님을 찾아뵐 시간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쯤에서 한민갑을 소개했던 한경석의 논문으로 돌아가 보자. 한민갑이 1946년에 월남을 했고 아무런 연고도 없을 것 같은 계룡산 근처에 정착했던 것은, 아마도 그 이전인 1940년에 7판본 인쇄와 관련하여 대전의 석남촌에 머물면서 만났던 고성 이씨 가문과의 인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경석이 소개한 익문사는 이문사가, 활판의 글은 석판의 글이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녹취 과정에서 착오가 생길 수도 있고 무엇보다 활판에는 별도로 글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보(保)와 권(卷)

한두정 선생의 필체는 이경성이 수집한 간찰을 통해서, 한민갑의 글씨는 두 〈갑오본〉 초록과 다른 필사본을 통해서 알려졌다. 이것들과 7판본의 필체를 비교하면 두 분의 글씨는 아니다. 나는 7판본의 글씨에서 특징적인 두 글자를 발견했다. 보호할 보자와 책 권자이다. 뭐 다른  글자를 더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보자는 우선 제목에 들어가니 쉽게 보인다.

 

보호할 보(保)자는 보통은 인 변에 입 구 아래로 나무 목을 쓰는데, 7판본 글씨를 쓴 사람은 입 구를 쓸 자리에 마치 세모꼴처럼 썼다.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 간기면까지 같은 필체로 일관되게 썼다. 그리고 책 권(卷)은 먼저 찍는 점 두 개를 보통의 경우처럼 바깥으로 삐치지 않고 안쪽으로 삐쳐서 썼다.

  〈수세보원〉의 9판본으로 평가를 받는, 1963년 7월에 윤완중이 완성한 석인본에서는 이 보자를 흉내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흉내만 내다가 곧바로 일관성을 상실하고 만다.

 

격치고

2019년 6월에 나온 모운문고 목록에 보니 애석하게도 『상교현토 동의수세보원』은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책이 보였다. 바로 『격치고』이다. 한두정 선생은 1940년이 회갑년이다. 모암 이인구는 1940년에 51세였다. 만약 한민갑이 대전에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한두정 선생이 동행했다면, 한두정 선생이 모암 선생을 만나 자신이 발행한 스승 동무 공의 책을 선물했을 거라고 상상해 보는 것이 허튼 공상은 아닐 것이다.

책의 인쇄라는 비즈니스적인 관계 말고, 두 분의 인간적인 유대를 증명하는 정표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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