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안세영의 도서비평] 필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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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안세영의 도서비평] 필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면서
  • 승인 2021.05.07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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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영

안세영

ajhj@unitel.co.kr

1987.02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1993. 02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박사 1996.10-현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1997.03-2012.02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신계내과학교실 주임교수 2017.03-2020.02 대한한방내과학회장 저서 남자 그리고 여자, 갑상선클리닉, 몸 한의학으로 다시 태어나다, 성학, 다한증의 이해와 치료 등


도서비평┃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얼마 전 아버님께서 별세하셨습니다. 그동안 상당히 건강하셨기에 당장 내년의 미수(米壽)는 물론 백수(白壽)도 가능하리라 내심 기대했는데, 허무하게도 와병(臥病)으로 입원 한 달 보름여 만에 도피안(到彼岸)하셨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간병 기간 동안 존엄사를 비롯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던데, 최종적으로는 사람이 나고 자라 늙어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로 귀결되더군요. 우연히 태어나 필연적으로 죽는 우리들 삶에 대해 더욱 심사숙고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출간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병상에 누워계셨던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고 싶어 구독한 책입니다. 별다른 차도를 보이지 않고 날로 악화되는 병세로 신음하시던 선친께서, 저승사자가 바짝 곁에 다가왔음을 느끼며 어떤 마음이셨을까 도통 헤아리기 어려웠거든요. 한밤중에 섬망 증상이 나타날 때면 얼토당토않은 말씀을 하시다가도, 아침에 잠깐 의식이 맑을 때면 여유롭게 농담까지 건네셨으니….

지은이는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宮野 眞生子)와 인류학자 이소노 마호(磯野 眞穂) 두 분입니다. 불혹을 갓 넘긴 나이에 유방암의 다발성 전이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철학자와, 임상 현장을 조사하며 질병·죽음·확률·선택의 문제에 천착해온 의료인류학자가 주고받은 20통의 서신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거든요. 편지글 형식이라 술술 읽히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는 우연과 필연, 질병과 의료, 운명과 선택, 삶과 죽음 등 모두 묵직한 것들입니다. 논문이라면 질병을 앓는 삶의 불확실성과 위험성에 관한 철학적·의료인류학적 고찰이라 이름붙이지 않았을까요?

책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릅니다」라는 첫 번째 편지부터 「정말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라는 열 번째 편지까지, 두 달 가량(2019.04.27.∼2019.07.01) 오고 간 각 10통의 편지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 보여줍니다. 저자들의 전공이 전공인지라 쉽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읽노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부분이 상당히 많더군요. 전후 문맥을 살펴야 의미가 더욱 선명하겠지만, 저는 “현대(서양)의료에는 확률론으로 가장한 약한 운명론이 많다”, “합리적인 선택이라며 제시하는 과학적 근거도 결국 일어날지 모르는 일들을 쌓아올린 것에 불과하다”, “대체요법을 둘러싼 문제는 근거 제일주의가 아니라 희망과 신뢰의 관점에서 논해야 한다”, “병에 걸리는 건 당사자 혼자일지라도 그 영향은 환자 자신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결국 필연이란 없지 않을까”, “불운은 한 줄로 늘어선 여러 가능성 중 실제로 한 가지가 일어난 것이고, 불행은 이미 일어난 일을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 두고 의미를 부여한 결과이다” “불운이라는 부조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인생을 고정한 순간 불행이라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등의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책을 완독하고 나니, 병고에 몸부림치면서도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엄친(嚴親)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사셨던 게 아닐까 여겨집니다. 인간사 회자정리(會者定離)는 당연·필연인 줄 알면서도, 아직까지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또 싫습니다.

 

안세영 /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안세영
1987.02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1993. 02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박사 1996.10-현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1997.03-2012.02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신계내과학교실 주임교수 2017.03-2020.02 대한한방내과학회장 저서 남자 그리고 여자, 갑상선클리닉, 몸 한의학으로 다시 태어나다, 성학, 다한증의 이해와 치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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