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醫壽世保元 甲午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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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醫壽世保元 甲午本
  • 승인 2021.04.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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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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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世保元〉 들춰 보기_18

(1) 韓斗正의 출판 사업

예나 지금이나 책을 만드는 일은 原稿를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精誠이 필요하고 특히 많은 資金이 필요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사정이 더 나빴다. 1909223일에 공포한 출판법에 의해서 한국인의 출판 활동은 크게 억제를 받았다.1) 원고가 우선 이 출판법의 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런 후에는 자금을 댈 사람, 원고를 편집하고 교열하는 사람, 종이를 공급하는 사람, 인쇄하는 사람, 완성된 책을 운반할 사람, 판매와 배포를 책임진 사람, 중간중간에 허드렛일을 할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의 정성이 모여야 한다.

만약에 한 번이 아니고 연속적인 출판 사업이라면 이런 작업 진행 과정을 기획하고 점검하고 감독할 사람이 또 있어야 한다. 그는 이 출판 사업과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인정과 지지를 얻은 사람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한두정 선생이 1930년대 중후반에 함흥에서 주변으로부터 그렇게 인정을 받고 그런 지지를 획득했다고 본다. 선생은 굳센 실천 의지와 치밀함 그리고 誠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企劃 아래 1940126일에 明善錄, 1940721일에는 格致藁, 1941410일에는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이 차례로 발간되었다.2)

明善錄이 맨 처음 나온 것은 뚜렷한 이유가 있다. 東武 철학의 바탕을 芸菴 韓錫地로 본 것이다.3) 그리고 格致藁, 그런 후에 동무 철학의 완성이라고 판단한 壽世保元으로 이어지는 출판 계획을 짰던 것이다.4) 연이은 출판 사업을 혼자 다 챙기기는 버거운 일이다. 韓敏善은 선생 밑에서 계속 校閱을 맡아서 보면서 한두정 선생을 도왔다.

 

(2) 推理

이것은 나 혼자서 하는 추리이다.

韓斗正 선생은 栗洞契 門人들과는 세대차이가 있다. 그리고 아마도 初版(辛丑版)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은 이전 版本과는 다른 壽世保元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면 꼭 필요한 작업이 있다. 먼저 甲午舊本庚子新本의 내용을 확인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소문을 했더니 咸州郡 川西面 雲洞里, 東武 公의 큰아들인 龍海子孫(鎭顯 1891~ /亨雨 1929~ )이 두루마리(卷軸裝) 글을 보관하고 있다는 걸 들었다. 운동리는 한두정 선생의 原籍地6)이기도 하므로 그 동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에 한두정 선생은 咸興에 살고 있었다.7)

東武 公孫子李鎭顯과 동무 공의 이복동생인 李燮曾의 손자인 李鎭胤(1894~1961)6촌간이다. 그리고 이진현이 이진윤보다 세 살 위다. 이진윤의 가족은 동무 공의 本家沙村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두정 선생은 아마도 사촌 본가에 들러서 자신의 출판 계획을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본가에 보관 중인 자료도 살폈을 것이다.8)

그러다가 이진윤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이진현에게 부탁해야 하는 거라면 한두정 선생보다는 6촌간인 이진윤이 하는 것이 더 용이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이진현에게서 두루마리 글을 빌렸고, 한두정 선생 밑에서 출판 사업의 실무를 맡아서 보던 韓敏甲9)이 나서서 초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3) 甲午本 抄錄의 목적

韓斗正 선생이 이 抄錄 작업을 진행한 목적은 무엇일까. 두 번에 걸쳐 발굴된 초록본의 제목이 각각 東醫壽世保元 甲午本東醫壽世保元 舊本인 것에 단서가 있다. 이 작업은 근본적으로 甲午舊本에 대한 확인이었다. 그러면서 新本印本을 아울러 대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은 壽世保元체계에 대한 眼目이 있어야 한다.

한두정 선생은 사전에 한민갑과 함께 초록하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먼저 目錄을 만들고 條文數를 기록하고, 의 조문수와 갑오구본과 경자신본의 조문수를 기록한다.10) 그리고 備考의 내용을 약속했다.

이 초록을 기초로 한두정 선생은 7판본을 어떤 내용으로 만들 것인지에 관한 편집체계를 결정했다. 그리고 책이 완성되고 나면 이 초록본의 중요도는 그리 크지 않게 된다.11) 왜냐하면 구본과 신본은 龍海 氏의 집안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12)

李鎭胤은 이때에 수세보원에 대한 안목이 뛰어났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13) 그래도 자신의 집에서 무언가 중요한 일이 시행되고 있다는 정도를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이 초록본을 구해서 소장했을 것이다.

그동안 학계의 연구에서는 이진윤이 한민갑에게 시켜서 동무의 두루마리 글과 동의수세보원 활자본을 비교하여 초록한 것이라는 李聖洙의 증언만을 다루었을 뿐 초록의 목적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東醫壽世保元 甲午本본문의 첫 장 하단에 이진윤의 인장과 藏書印이 찍혀 있다. 즉 초록이 완료된 후에 찍은 것이다. 하지만 所藏과 초록의 企劃을 동일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이진윤을 초록의 주도자가 아니라 단순한 소장자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성수는 20009월에 동의수세보원 갑오본을 공개하던 날, “의학에 대해서 문외한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높은 의료경지에 올랐을는지 모른다는 시중의 곡해를 듣지 않기 위해 그동안 밝히지 않고 지내왔다.”14)고 했다. 이 말은 초록본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라기보다는 이제마의 후손임을 밝히지 않았던 이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의학의 문외한임으로 이 자료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홍은표 장군을 통해서 사상체질의학회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선친이 물려준 자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진윤이 새로 정리한 족보(璿源派乘)와 함께 그들이 이제마의 후손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요 보물이기는 하다.

 

(4) 保元契 韓敏善

韓敏甲에 대한 정보는 韓炅錫2001년에 논문을 쓰면서 찾아냈고, 그의 아들인 韓治文(1927~ )을 인터뷰했다. 한민갑은 돌림자가 甲字이다.

연이은 출판 사업에서 한두정 선생을 도와서 교열을 맡았던 韓敏善에 대해서는 학계에 알져진 바가 없었다. 淸州韓氏 禮賓尹公派 族譜를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에서 한민선을 검색했다. 戊寅生 韓壽鉉의 아들인 한민선이 나왔다. 己酉生이니 7版本을 교열한 한민선이 이 사람이라면, 己酉年1909년으로 해서 1940년에 32세였다. 이 한민선은 善字 돌림이다.

 

(5) 甲午本 抄錄本流轉

李璟城2000년에 9월에 東醫壽世保元 甲午本15)을 발굴하고, 200310월에는 東醫壽世保元 舊本16)을 또 찾아냈다. 이경성은, 두 초록본은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대부분 동일하고 필체도 비슷해서 필사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의견을 내었다. 그러니까 韓敏甲19407월에 沙村에서 초록한 것을, 12월에는 大田에서 正書했다는 견해이다. 定平 사람 한민갑은 왜 대전에 갔던 것일까.

明善錄格致藁鉛活字로 함흥의 德興印刷所에서 찍었다. 그런데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石版으로 大田府以文社에서 인쇄했다. 함흥에서는 석판인쇄가 어려웠던 것 같다. 7판본의 인쇄는 19401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 한민갑이 한두정 선생의 을 받고 대전으로 派遣되었던 것 같다.

大田府石南村本은 현재 국회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표지에 붓글씨가 아닌 파란색 펜글씨로 崔冕甲이라고 적혀 있다. 이름이 익숙하다. 1911년에 再版을 간행했던 네 명(崔冕甲 高敬必 金重瑞 李增謨) 중의 한 사람이다. 書物은 최면갑의 手中을 거쳤던 것이다.

참고문헌

1) 이경성, 갑오본 동의수세보원의 체계에 대한 고찰」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2000.

2) 한경석, 동의수세보원 갑오본에 관한 연구동국대학교 대학원 2000.

3) 한경석, 동의수세보원 갑오본의 서지학적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2001.

4) 안상우, 새로 공개된 사상의학 자료 5종의 史料 가치」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2001.

5) 이경성, 동의수세보원 판본에 관한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2005.

6) 이경성, 璿源派乘中心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生涯 硏究원광대 대학원 2008.

7) 이태규, 咸山沙村 동의수세보원 甲午舊本詳校懸吐 동의수세보원의 비교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2008.

8) 정진석, 일제강점기의 출판환경과 법적 규제」 『근대서지2012.

9) 일제강점기 가장 많이 허가된 출판물은 족보 [연합뉴스] 2013. 2. 11.

10) 이기복, 동무 이제마의 의학사상과 실천서울대학교 대학원 2014. 8.

 

각주

1) 일제강점기 가장 많이 허가된 출판물은 족보 [연합뉴스] 2013. 2. 11. 

2) 이태규는 논문에서 “사상의학을 새롭게 정리하려는 이 당시 함흥의 분위기”라고 썼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것은 순전히 한두정이라는 걸출한 1인의 계획이었다고 생각한다. 

3)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 뒷장에 東武 公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끝에 ‘芸菴淵源’이라고 넣었다.  
4)  그리고 출판을 하지는 않았는데, 한두정 선생은 〈東武遺稿〉를 필사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했다고 짐작한다. 필사를 할 때 사용된 종이가 『명선록』의 파지로, 그것의 이면지에 필사를 했다.

5)  초판(1901년)부터 5판(1921년)까지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6판본(1936년)은 北京에서 石下 韓秉武가 펴냈는데, 韓斗正 선생이 7版本에서 6版本을 언급한 것을 보면 선생은 실물을 보았던 것 같다. 6版本은 현재 中國國家圖書館이 소장하고 있다. 

6) 咸州郡 川西面 雲洞里 379番地

7) 咸興府 昭和2町目 46番地

8) 그래서 沙村 본가에 보관 중이던 再版本에 加筆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9)1899. 1. 12. ~ 1950. 1. 24.
   당시 한민갑의 거주지는 定平이었다고 한민갑의 아들인 韓治文이 말했다. 

10) 條文數가 존재하는 것은 『東醫壽世保元』 版本 중에 7판본이 유일하다. 

11) 한민갑은 石南村 초록본을 보관하던 중에 이면지로 활용하기도 했다.

12) 하지만 어떤 물건이 역사 속에서 갖게 되는 가치는 상황에 따라서 상대적이다. 龍海 氏의 집안에서 간직하던 갑오구본과 경자신본은 아직까지 학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도리어 한민갑의 초록본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13) 이성수의 증언에 의하면, 나이 50살이 될 때까지 광산 사업을 하느라 거의 客地로 떠돌았다고 한다.

14) 『한의신문』 1001호 2000. 10. 9.(월)

15) 〈咸山沙村 東醫壽世保元 甲午舊本〉 歲庚辰七月二日韓敏甲筆

16) 〈大田府石南村本〉 時庚辰臘月朔謄書于大田府石南村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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