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뇌지예 - 즐거움을 누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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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뇌지예 - 즐거움을 누리는 삶
  • 승인 2021.01.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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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 원장

작년 한 해의 매출을 정리하여 회계사무실에 보내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참 힘들었던 2020년 한해를 살아내고, 그 와중에 아이들 키우고 자식된 도리, 친구된 도리를 다 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은 심정일 것 같다.

문득 어떤 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안빈낙도란 지배자층에서 피지배층을 조종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며, 아래 쳐다보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은 가난한 것들이 자기들보다 더 가난한 것들 쳐다보며 하는 자위라는 말을 열변을 토하며 하던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당신과 나의 생각은 다르다며 듣다가, 어느 날은 정말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내가 정말 내 결핍을 정당화하느라 지금 이 처지에 감사하다고 억지로 나를 세뇌하는 걸까? 그래서 더 나은 상황을 만들지 못하고 이 상황에 매몰되어 이렇게 늙어 죽는 것일까?

과연 기쁘게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주역에는 기쁘다는 뜻인 豫의 이름을 가진 괘가 있다. 위에는 천둥번개가 치고 아래에는 땅이 있는 모양새의 뇌지예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豫 利建侯行師

彖曰 豫剛應而志行 順以動豫 豫順以動 故天地如之 而況建侯行師乎 天地以順動 故日月不過 而四時不忒 聖人以順動 則刑罰淸而民服 豫之時義大矣哉

아무래도 예괘의 즐거움은 일이 순리에 따라 착착 이루어지는데서 오는 기쁨인 것 같다. 때가 되면 해가 지고 또 떠오르듯, 사계절이 순환하듯 반드시 이루어지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 그래서 그 법칙을 알고 거기 따르는 것이 예괘가 말하는 즐거움이다.

初六 鳴豫凶

사람이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나기도 하는 것이지만, 초육은 흉하다고 했다. 어째서 그럴까? 상전에는 志窮凶也라 했다. 뜻이 궁하여 흉하다는 것이다. 초육은 뒤에 말할 구사의 짝이다. 예괘에서 유일하게 음양응을 이루는 짝인 것이다. 주위의 다른 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즐거움을 두고 울고 있으니 뜻이 궁하고 흉할 수 밖에 없다.

六二 介于石 不終日貞吉

육이는 음이 음 자리에 바르게 있으며 내괘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초육처럼 음양응이 되는 짝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모든 음효가 넘보는 유일한 양효인 구사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자기 짝이 올바로 서도록 내괘의 중심을 잡고 있다. 그러니 망설일 것도 기다릴 것도 없이 자기가 하려는 대로 하면 된다. 다른 효사에는 豫 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육이와 육오에는 그 말이 없다. 예괘의 즐거움은 구사에게서 나오는데, 내괘와 외괘의 중앙을 지키는 육이와 육오는 구사가 주는 즐거움에 매달려서는 안되기 때문인것 같다. 육이는 즐거움도 포기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바르고 길할 수 밖에 없다.

六三 盱豫 悔遲有悔

육삼은 음이 양 자리에 있으니 자리가 마땅하지 않다. 그런데 바로 위에 예괘의 즐거움이 되는 구사가 있다. 육삼은 상육의 짝이지만 어차피 음양응도 되지 않으며, 상육 역시 육삼에게는 관심이 없는듯 하다. 그러니 자꾸 옆에 있는 구사를 넘겨다본다. 그러나 올바른 자기 짝도 아닌데 구사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남자라 하더라도 그가 금슬 좋은 짝이 있는 유부남이라면 기다리고 또 기다린들, 어찌어찌 하여 둘을 헤어지게 만들고 그 남자를 차지한다고 한들 이런 행동이 올바른 것은 될 수 없다. 그러니 즐거움을 탐한 끝에 뉘우침이 있을 뿐이다.

九四 由豫 大有得 勿疑朋盍簪

구사는 예괘의 유일한 양효이다. 예괘의 모든 즐거움은 구사로부터 나온다. 상전에는 크게 얻음이 있는 것은 志大行也, 즉 뜻이 크게 행하여짐이라고 했다. 예괘의 괘사에 제후를 세우고 군사를 행한다고 했다. 구사가 바로 그 제후이며, 나머지 음효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는 왕이 아니다. 바로 위에 있는 육오는 왕이지만 힘이 약하다. 그러니 서로 의심하는 바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유약한 왕 아래에서 군사를 행하는 제후는 위협적이다. 그러나 예괘의 즐거움은 순행에서 나온다. 자기의 할 도리를 하며 해야할 것을 처리하는 일이 제대로 잘 이루어질 때의 즐거움이다. 마치 몇날 며칠을 밤새워 만든 도미노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멋지게 넘어질때의 쾌감과 같은, 계획한 모양새대로 일이 진행될때의 기쁨은 보람과 자신감을 준다. 구사가 가지는 것은 그런 기쁨이다. 육오의 자리를 넘보고 마침내 그 하나마저 탐하는 기쁨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훌륭히 해내고 그로 인해 세상이 평안해짐을 볼 때의 즐거움이다. 이것을 알아주면 육오 역시 의심을 거두고 구사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六五 貞疾 恒不死

육오는 외괘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지만 힘이 없다. 음양응을 이루어 자기를 지지해줄 정당한 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돌처럼 절개를 지키고 있는 자기 짝이 있으며 아래에서 구사가 굳건하게 버티며 자기 손발이 되어준다. 육오의 입장에서는 구사는 고맙고도 두려운 존재다. 구사가 없었으면 일을 해결할 수도 없었겠지만, 또한 구사가 없이는 일을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은 큰 흠이다. 그러나 육오는 왕이다. 구사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한 죽지 않는다.

上六 冥豫 成有渝 无咎

상육은 육삼의 짝이지만 육삼도 상육도 모두 구사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다. 상육의 할 도리는 원래 육오를 보필하는 것인데, 자기 짝도 보필해야 할 왕도 안 보이고 구사가 주는 즐거움에만 취해 있으니 볼 것을 보지 못한다. 그 즐거움을 다 누린 뒤에 정신을 차리고 자기 본분으로 돌아간다면 허물이 없다. 상전에는 冥豫在上 何可長也라 하였다. 기쁜 것도 적당히 끝내야 한다. 기말고사에 한 번 전교 1등을 한 기쁨은 그 당시로 끝나는 것이다. 며칠, 혹은 몇 달을 갈 수는 있겠으나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그 기쁨에 취해 있으면 비정상적이다. 나는 전교 1등이야, 하는 자신감에 취해 다른 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미 이룬 성취에만 집중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만약 이미 이룬 후에도 또 변화할 수 있다면 이 기쁨에 지금 취한다 하더라도 허물이 없다. 그러나 더 이상 변하는 것 없이 그 사실만 붙들고 있다면 결국은 그 기쁨의 의미조차 퇴색하게 된다.

예괘의 효사들 중 가장 잘 풀린 것은 단연코 구사이다. 그러나 구사의 효사에는 길하다는 말이 없다. 구사를 제외하고 豫가 들어간 효사들은 뉘우치거나, 노력해야 뉘우침을 면하거나, 심지어 흉하다. 자기 것이 아닌 즐거움을 넘보는 육삼이나 상육이 더 흉할 법도 한데, 주역은 즐거움이 자기 것임에도 불구하고 울고 있는 초육을 가장 흉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즐거움을 넘보지 않은 돌같은 육이를 보고 길하다고 한다. 금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지지 못할 즐거움이라면 넘보고 샘을 내거나 어거지로 내 것으로 만드느니 아예 탐을 내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키는 편이 이로울 수 있다. 남의 더 큰 것을 부러워하느라고 내가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울고 있으면 자기만 불행해진다.

‘가난한 자들의 정신승리’를 말하던 사람은 아마도 즐거운 삶을 원했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즐거운 삶은 아마도 큰 돈을 가지고 있고 가사 도우미를 갖고 있으며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자식들과 자기 말이라면 껌뻑 죽는 배우자를 가진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은 그냥 ‘돈’이었으며 가사는 자기 손으로 해야 했고 자식들은 더러 점수가 나쁜 시험지를 가지고 왔으며 배우자는 그를 타박하곤 했다. 그의 즐거움은 아무리 용을 써도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랬었다. ‘25층 아래를 내려다보며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정말 뛰어내렸는지 아닌지는 나는 알 수 없다. 나의 즐거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를 멀리하는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불평과 비난에서 자유로워지자 물질적으로 하나도 바뀐 것 없는 나의 생활은 다시 평온해졌다. 심지어 때때로 즐겁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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