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 石下 韓秉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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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 石下 韓秉武
  • 승인 2021.01.08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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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壽世保元〉 들춰 보기_11

한병무는 1893년생이고 그의 동생 韓秉道(1900~1976)는 일곱 살 아래다. 한병도는 韓雪野란 筆名으로 작품을 발표했던 카프(KAPF)1) 계열 작가이다. 해방 이후 고향인 함흥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함경도 대표를 지냈고,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도 역임하는 등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정치적인 성공을 누렸다. 한설야의 자전적 장편소설인 「탑」에는 동무 이제마가 ‘최문환의 난’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등장한다.

한설야는 1938년 『조광』 10월호에 실은 「고난기」에서 1919년에 家兄을 따라 北京에 갔다고 썼다. 한설야는 이후에도 북경과 滿洲를 자주 왕래하였다. 한병무, 한병도 형제의 父親은 韓稷淵(1864~1926)이다. 한직연은 〈壽世保元〉 初版에 栗洞契 門人으로 이름을 올린 일곱 명 중 한 사람이다.

한병무는 1936년 12월 25일에 北平(북경)의 四象辨證醫學硏究社에서 〈壽世保元〉을 발행한다. 이것은 〈壽世保元〉으로서는 6版이다. 이것을 李璟城 원장이 한국한의학연구원을 통해서 中國國家圖書館(National Library of China NLC)에 소장되어 있다는 정보를 확인한 바 있으나, 아직 학계에서 실물을 확인하지는 못한 상태이다.

나는 이경성 원장으로부터 한설야에 관한 파일 몇 개를 받았다. 이경성 원장은 그 자료를 통해서 ‘한병도의 아버지가 광산사업과 개간사업을 했을 거란 추정’과, ‘한병무가 동생을 중국으로 데리고 갔고 동생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 그리고 ‘한병무가 1926년에 부친이 별세한 후에 식솔들을 데리고 滿洲로 이주했다’는 정보를 얻었던 것 같다.

여기까지가 韓秉武에 대해서 알려진 전부였다.

 

(1) 탐색

나는 먼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다. 함경도 정평에서 1922년에 定平文藝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한 한병무가 검색되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에 흥미로운 인물이 있었다. 韓魯堂이다. 洪淳用 선생은 1964년에 『大韓漢醫學會報』 12호에 쓴 「東武 李濟馬傳」에서, 北京에서 6版을 발행한 韓秉武의 號를 魯堂이라고 하였다. 臨政이 어떤 곳이던가. 늘 감시의 눈길을 받던 곳이다. 본명을 숨기기 위해 號를 붙여서 썼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은 重慶市에 거주하던 한인 명단에도 있는데 1945년에 53세라고 되어 있다. 한병무가 1893년생이니 나이가 맞다. 그리고 더 주목되는 것은 ‘公醫’라는 직책2)이다. 의사인 것이다.

한설야는 주로 小說을 쓴 작가이다. 그리고 신문에 기행문이나 기사도 썼다. 나는 그가 자신이 쓴 글에서 형에 관해 직접 언급한 것이 분명히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RISS3)를 뒤져서 ‘한설야 연구 논문’을 검색했고, 연구자들의 신상정보와 이메일을 찾았다. 2020년 12월 23일에 우선 열 곳으로 이메일을 띄웠다.

 

(2) 다 때가 있다

그러다가 鎭海에 있는 박병희 원장이, ‘중국국가도서관에 회원가입을 하면 그곳에 소장된 〈수세보원〉의 내용을 열람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알려왔다. 회원가입 절차가 휴대전화로 간단하게 인증하는 방식이라는 것인데, 중국 번호라야 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2013년에 「의료인을 위한 체질학교」로 인연을 맺은 徐蓓蓓(beibei)4) 원장이 생각났다. 카카오톡으로 소장정보 링크를 알려주고 만약에 회원가입이 되어 책 내용을 열람할 수 있으면, ‘겉표지, 속표지, 序文(있다면), 目錄(있다면), 성명론 첫 페이지, 사상인변증론 마지막 페이지, 刊記面 이렇게 확인해주면 좋겠다’고 남겼다.

퇴근길에 구룡터널 앞 사거리에서 멈추었을 때, 톡을 확인했다. 徐 원장에게서 그림 파일 여덟 개가 도착해 있었다.

 

세상 일이 다 때가 있다. 근래에는 자주 그런 생각이 들지만5) 새삼 그걸 실감했다.

刊記面6)을 먼저 보고 놀랐다. 이 책은 非賣品이다. 나는 요 며칠 한병무를 생각하면서 그가 스스로 큰 짐을 졌고 사명감으로 충만했을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사실 동무 공의 직계 후손들은 변변치 않다. 동무 공이 作故한 후에 그들이 한 역할은 미미했다. 한병무가 품었던 그런 안타까움과 사명감이 멀리 북경에서 이 책을 펴내도록 만들었다고 추측한다.

이 책에는 目次가 있다. 〈壽世保元〉 版本으로는 처음이다. 속표지 앞 쪽에, 제목은 따로 붙이지 않은 한병무의 글이 있다. 서문이라고 하지 않았으니 발행기 같은 것이다. 글의 말미에 ‘後學 韓石下’라고 남겼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을 再傳 弟子라고 표현했다. 부친이 동무 공의 문하였으니 그렇다. 자신은 부친에게서 배웠다는 뜻이다. 韓石下를 보고 그동안 가졌던 한 가지 의문이 풀렸다. 한두정 선생이 7版에서 역대 판본을 소개하면서 6판 부분에 ‘韓秉武 밑에 작은 글씨로 石下’라고 넣어두었던 것 말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사상학계에서는 ‘한병무 등’이라고 해석해 왔다. ‘한병무 혼자 말고 다른 누군가와 같이’로 해석해버렸던 것이다.

韓斗正 선생은 韓石下가 펴낸 6版을 분명히 받아서 보았고, 한석하가 바로 한병무라고 친절하고도 簡明하게 적어두었던 것인데 말이다.

 

(3) 後學 韓石下

한설야의 글에서 형에 대한 언급을 더 찾지는 못했지만, 뜻밖에도 한병무가 6판 〈수세보원〉 안에 남긴 글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책을 내던 1936년 무렵에 북경이거나 아니면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漢醫로 활동했던 것 같다. 그리고 韓石下 말고 韓魯堂이라는 別稱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에서 公醫로 활동했다고 推理해 볼 수도 있다.

아래에 그가 남긴 글을 번역해서 옮기면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어쩌면 韓石下란 분이 잘 이해되기도 하면서 더욱 궁금해진다.

훌륭한 宰相이 되지 못할 바에는 좋은 醫師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世上을 救濟하고 사람을 살리는 功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醫道는 매우 깊고 미묘하여 淺薄한 자는 능히 알지를 못한다. 반드시 天地 生物의 이치에 통하고, 金石과 草木이 生化하는 성질에 밝아야 한다. 더욱이 人生 先天의 本性, 後天의 虛實과 때와 장소에 따른 대처를 다 꿰뚫은 연후에야 모름지기 症狀에 대응하여 藥을 투여할 수 있다.

東武 선생은 하늘이 낸 資質을 타고 난 뛰어난 인물이었다. 諸家의 학설에 두루 통달했고, 人生과 宇宙의 淵源을 탐구하고, 陰陽이 生化하는 지극한 理致를 연구하여, 人體에 四象의 標徵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을 發明했다. 四象이란 太陽과 少陽, 太陰과 少陰이다. 이 四象은 人生에 固定된 성질의 뿌리이다. 性情의 剛柔, 體質의 寒煖, 思想의 粗細, 意志의 强弱으로 각각 分別이 있다.

四象으로 이미 다름이 있으므로, 즉 病患의 根源 역시 다르다. 그러니 藥을 투여하고 治療하는 방법도 본디 크나큰 分別이 있다. 四象이 명확하지 않고 만약에 寒熱도 분별하지 않고 서둘러 藥劑를 투여하면 病者는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四象으로 辨證하는 방법은 漢醫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 진실로 깊고 또 크다.

近年에 漢醫에서 많은 發明이 있었다. 이런 고로 政府에서도 硏究하는 기관을 설치하여 名醫와 뛰어난 儒學者들이 漢醫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니 將來에 특수한 進步가 반드시 있으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생각하건대 이 四象辨證의 방법은 아직은 세상에서 보편적이지는 않다. 

나는 英敏하지 못한데,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東武 선생의 再傳 弟子가 되었다. 이 法이 漢醫에게 크게 보탬이 된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으므로, 특별히 장차 이 책을 약간 印刷하여 나라 안의 賢明한 분들과 同道 名士들이 비치하여 參考가 되도록 尊敬의 마음을 담아 드리려고 한다. 만약에 이 冊의 밖에서 發明하는 바가 있다면 序文을 주시기를 더욱 祈禱하는 바이다. 이에 보낸다.

東武 公의 後學 韓石下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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