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의학 갈등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은 역사 돌아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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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의학 갈등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은 역사 돌아보는 것”
  • 승인 2020.12.23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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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호 기자

김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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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근대 중국 동서의학 논쟁사 번역한 이충열 가천한의대 교수

중국의 다원주의 의료제도 눈여겨 볼 가치가 있어

 

[민족의학신문=김춘호 기자] 최근 <근대 중국 동서의학 논쟁사>가 번역출간됐다. 이 책은 중의학과 서양의학 사이의 논쟁 역사를 다룬 것이지만 한국의 보건의료 상황을 풀어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충열 교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근 번역출간한 <근대 중국 동서의학 논쟁사>는 어떤 책인가

이 책의 원 제목은 <근대중서의논쟁사近代中西醫論爭史>이며, 근대시기 중국에서 있었던 중의학과 서양의학 사이의 논쟁 역사를 다룬 최초의 학술서다. 1983년 중서의결합연구회 허베이(河北)분회에서 내부용 비매품으로 처음 발간되었고, 1989년 안후이(安徽)과학기술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출판됐다. 그리고 2012년 학원(學苑)출판사에서 제2판이 발간됐다. 이 책이 처음 발간될 당시 근대 중국의학사가 아직 완벽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 책은 발간 즉시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로 근대 중국의학사를 다룬 논문과 저서들에서는 이 책이 거의 빠짐없이 인용되고 있다. 또 이 책에는 근대시기 중국의학계의 활동상황을 엿볼 수 있는 교육, 학술단체, 학술잡지, 주요인물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어 근대 중국의학사를 소개하는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2001년 연구년을 맞아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니덤연구소(Needham Research Institute, 동아시아 과학사, 의학사 연구소)에 방문학자로 체류하고 있을 때 연구소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재미있게 읽은 것이 계기가 됐다. 1993년과 1995년에 있었던 한약분쟁을 직접 경험한 직후라 이 책이 다루는 주제에 더 관심이 끌렸던 것 같다. 그때부터 언젠가는 이 책을 번역해서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근대시기에 제도적으로 전통의학이 폐지되었거나 폐지될 위기를 겪었던 경험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그리고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근대시기에 시작된 동서의학 사이의 갈등이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하루 빨리 이런 갈등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길을 가야 할 텐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 자오훙쥔(趙洪鈞) 선생의 지도교수였던 마칸원(馬堪溫) 교수가 이 책의 초판 서문에 “역사적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집결시켜서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일하도록 하는 것”이 의학사의 임무라고 했는데 나도 이 말에 공감한다. 지금의 동서의학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은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이 책을 번역하게 됐다.

 

▶책의 저자인 중국 의학사 연구가 자오훙쥔(趙洪鈞)은 어떤 사람인가

자오훙쥔 선생은 1945년생으로 군의(軍醫)대학을 졸업한 서의사이다. 하지만 중의학을 좋아해서 장석순(張錫純)의 <의학충중참서록>을 혼자 읽기도 했다고 한다. 1978년 중국중의연구원(현, 중의과학원) 의사문헌연구실 첫 대학원생(중서의결합연구생)으로 입학해서 학위논문으로 쓴 것이 이 책이다. 2019년에는 중국 학원출판사에서 자오훙쥔 선생이 쓴 저작들을 모아 <조홍균의서십일종趙洪鈞醫書十一種>을 발간하기도 했다.

 

▶번역 기간은 어느정도 걸렸고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2001년 연구년을 다녀온 직후부터 틈틈이 번역작업을 했다. 하지만 내 전공이 의학사가 아니기 때문에 번역이 과외의 일이 되어 이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13년 여름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서점에서 이 책의 제2판을 발견하고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번역을 재개했다. 내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아 그 동안 벌여놓고 완성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번역작업을 추동한 중요한 동인이었을 것이다. 2016년 여름에 드디어 번역 초고를 어느 정도 마무리했지만 이제는 출판사를 찾는 것이 또 문제였다. 뒤돌아보면 한의학 전문 학술서적의 시장이 너무 좁아 출판사들이 다들 출판을 꺼려해서 출판사를 섭외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중국과 한국 모두 의료체제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의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한국에 비해 전통의학이 국가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유사한 갈등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각국에서의 전통의학의 현위치가 달라진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동서의학 논쟁사는 첫째,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양의 근대적인 제도와 학문, 과학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봉건적인 전통문화의 일부로서 한의학을 비판하게 되는 문화적 측면, 둘째, 국가보건의료체계를 서양의학 중심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의사들과 정치인, 엘리트 지식인들이 합심하여 근대적 보건의료체계 수립에 방해가 되는 한의학을 제도로부터 완전히 배제하려고 시도했던 제도적 측면, 셋째, 과학주의(scientism)가 팽배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음양오행이라는 사변적인 논리에 기초한 전통의학을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했던 학술적 측면이 서로 얽혀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대시기 한, 중, 일에서 벌어진 동서의학 갈등과 논쟁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서의학 논쟁이 전개되는 구체적인 과정은 나라마다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동아시아 3국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조건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한, 중, 일에서 전통의학의 위상과 역할이 서로 다른 것은 동서의학 갈등 경험 그 자체보다는 각 나라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 정치제도, 중시하는 사회적 가치의 차이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특히 중국은 공산 국가라 당이나 국가가 전통의학 정책을 결정하면 민간은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정책의 효율성 면에서 한국의 상황과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주목하는 중요한 변수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의 한양방 이원화 의료제도는 한의사와 의사의 직무범위를 배타적으로 규정하고 상호간에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이 특징이다. 1951년에 만들어진 이 제도는 지금까지 한의학의 영역을 지키고 한의사 직역을 보호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을 둘러싼 한, 양방 갈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제도는 현대과학이 발전시킨 기술들을 도입하는 것조차도 이 기술이 한의학적인 것인지, 서양의학적인 것인지를 다퉈야하는 경직된 제도다. 학제간 융합이 대세가 된 지금 이 제도는 오히려 한의학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중국 의료제도는 한국과 다르다. 한국처럼 중의와 서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중의와 서의의 직무를 배타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일부 영역을 상호 개방하고 있다. 이런 개방성은 제도적 특징에서 나온다. 즉, 중의사들이 서양의학 진단기계를 사용하고 간단한 약물처방과 시술을 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료법이 원칙적으로 법령에서 금지한 것 외에는 모든 행위를 용인하는 최소규제(포괄적 네거티브 규제)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연수교육 같은 것으로 이런 행위를 조금 더 엄격하게 관리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알고 있다.

‘중국식 이원적 일원화’라는 용어를 협회가 사용하여 마치 중국 의료제도가 일원화 제도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지만 엄밀히 말해 중국의 의료제도는 다원주의 의료제도다. 장하석 교수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구분하면서 다원주의의 장점으로 ‘관용’과 ‘상호작용’의 이득을 말했다. 의료의 측면에서 볼 때 ‘관용’이란 서양의학 외에도 의미있는 다른 의학체계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은 1980년에 “중의, 서의, 중서의결합 세 역량이 모두 발전되어야 하며 장기적으로 병존해야 한다. 이 세 역량을 단합시켜 의과학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우리나라 특색의 신의약학을 발전시킨다”는 그 유명한 중국 보건의료의 ‘3도로三道路’ 정책을 제시했다. 이 정책은 중의, 서의, 중서의결합이 독립적으로 발전하면서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있다. 또 장하석 교수가 말한 ‘상호작용’의 이득에는 서로 다른 체계 사이의 ‘융합’과 상대 체계에서 서로 좋은 것이 있으면 빌려다 쓰는 ‘채택’, 선의의 ‘경쟁’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중국 의료제도는 이것이 가능한 제도다.

나는 한국도 지금의 경직되고 배타적인 동서의학 관계에서 벗어나 ‘관용’과 ‘상호작용’의 이득을 누릴 수 있는 제도로의 변화가 필요한 때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다원주의 의료제도는 눈여겨 볼 가치가 있는 제도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의사들의 의학사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전통시대에 쓰여진 의서와 학술이론에 치우쳐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지금 이 시대에 작동하고 있는 한의학을 이해할 수 없다. 현대 한의학은 전통의학이면서도 현대화, 과학화, 체계화, 표준화를 지향한다. 그리고 동서의학 사이의 융합과 회통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것은 근대시기 동서의학의 갈등과 논쟁 상황을 겪으면서 한의학계가 찾아낸 새로운 한의학 발전 방향이었다. 이 책은 중의학계가 중의학의 존폐위기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역사적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 한의학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동서의학 사이의 갈등이 심각한 한국의 보건의료 상황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방향을 찾는데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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