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韓斗正
그동안 학계에 한두정 선생과 관련하여 알려진 身上 정보는 많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生沒이 밝혀지지 않았었다. 요 근래에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근현대인물자료로 한두정 선생이 검색되었다. 이 자료에 선생의 생년월일이 나왔다. 자료의 출처는 『朝鮮紳士寶鑑』1)이다. 이 책은 庚戌國恥 후, 1912년(大正 元年) 11월에 일본인인 다나카 세이고(田中正剛)가,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서 조선 내 명사들의 명단을 정리하여 편찬한 일본어판 명부인데, 구한말 유명인사 수천 명의 약력이 실려 있다.
여기에 한두정 선생에 대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선생은 1880년(庚辰年) 11월 18일에 태어났다. 淸州韓氏 禮賓尹公派 安川府院君 韓卿의 17世孫으로, 조부는 韓尙祺 부친은 韓道孝이다. 주소는 咸鏡南道 咸興郡 川西面 雲洞里 4의 8이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豊興學校를 졸업했다.2) 咸興鄕校의 文廟 校監을 5년간 역임했고 漢文敎師이다.
1938년(昭和 13년) 자료는 홍익한의원의 李璟城 원장이 찾았다. 『咸山志通紀』는 17세기에 성립한 私撰邑誌인데, 咸興府鄕校儒林會에서 『續修咸山志通紀』를 편찬하여 1938년 12월 18일에 발행하였다. 이 책의 뒤에 편집임원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한두정 선생의 이름이 있다. 여기에도 이름 밑에 川西라고 적혀 있다.
(2) 東武公과 韓斗正
올해에, ‘8체질의학 공부’라는 칼럼의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게 洪淳用과 保元契, 崔麟이 받은 처방전, 宋一炳과 壽東藥房에 관한 글을 썼다. 앞선 세대가 남긴 말이나 글은 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같은 격랑의 시대를 지나온 분들의 자료를 대하는 학계의 태도는 좀 엉성했다.
朴奭彦3)은 1971년에 『漢醫學』 제35호에 실은 「東武公의 일화」에 아래와 같이 썼다.
“韓斗正 先生은 東武公 門下에서 四象醫學을 修鍊한 분으로, 어려서 千字文을 배울 때부터 사랑을 받아왔으며, ‘너는 장차 커서 의원이 되지 말고 문학방면으로 나가서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어온 韓 先生은 이를 늘 心中에 새겨두고 있었으며, 후에 四象醫學에 조예가 깊으면서 평생에 의원 행세를 하지 않은 분이다.”
한두정 선생은 1880년생이다. 東武公은 1895년에 함흥으로 돌아온다. 40세(1876년) 이후에 漢城에서 무관으로, 그리고 진해현감4)을 거쳐 남산 아래에 있던 李源兢의 집에서 〈壽世保元〉을 집필5)했다. 한두정 선생은 東武公이 함흥으로 下鄕하기 전에는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다.6) 선생이 1895년 이후에 동무 공을 만났다면 천자문을 배울 시기는 아닌 것이다.7) 선생은 ‘東武公의 思想과 哲學을 평생 익혔으나 醫員으로서 적극적인 임상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는 부분을 기억해두자.
(3) 韓斗正과 朴奭彦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박석언과 이종사촌 사이인 崔世祚는 1985년 10월 15일에 박석언이 발간한 『東武 格致藁』 서문에서, 박석언이 ‘함흥 향교의 간부이며 儒學의 泰斗였던 한두정에게 10여년 事師하였다’고 썼다. 집에 모셔다가 배웠다는데, 박석언의 아들인 朴英聖도 李璟城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네 살쯤이던 시절의 기억에 ‘한복 입은 할아버지가 집에 계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영성은, 부친이 배우던 때가 1943년이나 1944년 무렵이라고 했다.
박석언은 1946년에 월남했다. 박영성은 또 ‘부친이 월남하기 전에 함흥에서 양의도 하고 한의도 했다’고 말했다. 집에 의료시술기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박석언이 越南 전에 의학계통의 정규교육을 받았거나 관련한 자격을 얻었다는 기록은 없으니, 혼자서 의료활동을 한 것이다.
박석언은 臨床家도 아니었던 한두정 선생에게 10여 년간 무엇을 배웠던 것일까. 나는 이것이 무척 궁금하다.
(4) 韓斗正의 플랜
1939년부터 이루어진 한두정 선생의 활약상은 출판기록으로 남아 있다. 1940년이 선생의 回甲年인 庚辰年이다. 연속적인 출판 사업이란 어떤 한 사람의 作心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런데 굳센 실천 의지와 치밀함 그리고 誠心을 가진 한 사람이 없다면 성취해낼 수도 없는 것이다. 사상의학의 역사 속에서 한두정의 이름이 빛나는 것은 선생이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한두정 선생의 기획 아래 선생이 編輯을 하고 韓敏善이 校閱을 맡아서, 1940년 1월 26일에 『明善錄』을, 1940년 7월 21일에는 『格致藁』를, 1941년 4월 10일에는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을 차례로 발간했다.8)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의 맨 뒷장에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있다. 東武公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끝에 ‘芸菴淵源’이라고 넣은 것이다. 선생은 東武 철학의 바탕을 芸菴 韓錫地로 본 것이다. 그래서 『明善錄』을 처음으로 그리고 『格致藁』로, 그런 후에 동무 철학의 완성이라고 판단한 『壽世保元』으로 이어지는 출판 플랜을 짰던 것이다.9)
(5) 甲午本과 韓敏甲
李璟城은 2000년에 洪淳用의 아들인 홍은표(1932~ ) 장군을 통해서 李鎭胤10)의 아들인 李聖洙(1926~ )를 찾았고, 2000년 9월에 전쟁기념관 관장실에서 이성수는 집안에 있던 〈咸山沙村 東醫壽世保元 甲午舊本〉을 공개했다. 이것은 1940년 7월 2일에 沙村에 있던 이진윤의 집에서 韓敏甲11)이 抄錄12)한 것으로 〈東醫壽世保元 甲午本〉이라고 제목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경성은 2003년 10월에 여의도에 있는 국회도서관에서 〈東醫壽世保元 舊本〉을 또 찾아냈다. 이 자료에는 1940년 12월 1일에 大田府 石南村에서 謄書하였다고 기록13)되어 있다. 이경성은 두 필사본은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대부분 동일하고 필체도 비슷해서14) 필사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의견을 내었다. 그러니까 한민갑은 1940년 7월에 咸興에서 초록한 것을 12월에는 大田에서 正書했다는 것이다. 定平 사람 한민갑은 왜 대전에 갔던 것일까.
韓炅錫은 2001년의 논문에서, 淸州韓氏 족보를 조사해서 강원도 원주에 사는 韓敏甲의 아들 韓治文(1929~ )을 찾아냈고 그를 인터뷰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민갑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게 되었다.
韓敏甲은 1899년 1월 12일에 함경도 定平에서 태어났다. 字는 光明 號는 芸南이다. 아버지는 用燮이다. 1946년에 월남하여 대전 계룡산 근처에 정착하여,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익문사에서 활판의 글을 썼다. 1950년 1월 24일에 대전에서 병환으로 별세했다. 슬하에 2남15)을 두었다. 墓所는 楊平郡 楊東面 金旺里 山 149번지이다. 성격이 매우 꼼꼼하고 차분하였고 화를 별로 내지 않았다. 서재에 책이 많았고 의학서적도 있었다. 평생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한민갑이 갑오본을 초록한 목적은 무엇일까. 그동안 학계의 연구에서는 ‘이진윤이 한민갑에게 시켜서 동무의 두루마리 글(卷軸裝)과 동의수세보원 활자본을 비교하여 초록한 것’이라는 이성수의 증언만을 다루었을 뿐 초록의 목적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東醫壽世保元 甲午本〉 본문의 첫 장 하단에 이진윤의 인장과 藏書印이 찍혀 있다. 즉 초록이 완료된 후에 찍은 것이다. 하지만 所藏과 초록의 企劃을 동일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이진윤을 ‘抄錄의 주도자가 아니라 단순한 소장자’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6) 韓斗正의 簡札
이경성은 코베이옥션을 통해서 한두정 선생이 썼던 간찰을 구했다. 1946년(丙戌年) 11월과 12월에, 洪原郡 三湖面 豊東里 韓直員(硏雲)에게 보낸 것이다. 광복 후에 북쪽에서도 주소체계가 변경되었다. 한두정 선생의 주소는 咸鏡南道 咸興市 解放里 2區 46番地이다. 해방리 2구는 일제강점기 때는 昭和町과 沙浦里였다.
원고 분량이 제한되어 미처 쓰지 못한 것은 다음을 기약한다.
※ 참고 문헌
1) 朴奭彦, 「東武公의 逸話」 『漢醫學』 제35호 1971.
2) 楊普景, 「조선 중기의 私撰邑誌에 관한 연구」 『國史館論叢』 제81집 1998.
3) 이경성, 「갑오본 동의수세보원의 체계에 대한 고찰」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2000.
4) 한경석, 「동의수세보원 갑오본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0.
5) 한경석, 「동의수세보원 갑오본의 서지학적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 2001.
6) 안상우, 「새로 공개된 사상의학 자료 5종의 史料 가치」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2001.
7) 이경성, 「동의수세보원 판본에 관한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 2005.
8) 이경성, 「璿源派乘을 中心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원광대 대학원 2008.
9) 이경성, [朴奭彦 선생 장남 박영성 씨 인터뷰 녹취록] 2010. 9. 15.
10) 이기복, 「동무 이제마의 의학사상과 실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4. 8.
각주)
1)田中正剛, 『朝鮮紳士寶鑑』 朝鮮出版協會 京城 1912. 11.
2)豊興學校는 근대 교육기관으로, 1897년에 함흥향교 내에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이곳에 모인 학생을外庠生이라 부르다가, 1905년에 사립풍흥학교라 하였다. 1909년에 사립일신학교와 병합되었으며, 1918년부터 함흥고등보통학교라 하여 남자중학교의 효시가 되었고, 뒤에 함남중학교로 개칭되었다.
3)1914. ~ 1988. 10.
4)1887년 2월 ~ 1889년 7월
5)1893년 7월 13일부터 1894년 4월 13일까지
6) 東武 공은 1876년 4월에 武官으로 出仕한 후 두 번 휴직기간이 있었다. 모친 별세로 인해서 1876년 6월 29일부터 1878년 8월 12일까지 약 22개월간이었고, 先塋을 移葬하는 사유로 1879년 8월 6일부터 1880년 11월 14일까지 약 15개월간이다. 두 번 모두 한두정 선생이 태어나기 이전이다.
7)박석언은 이어서 한두정 선생이 노루간(獐肝)을 먹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선생이 소양인이라고 하였으나 이 부분 역시 검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8)『明善錄』은 1939년 5월 6일부터 6월 17일까지 謄本을 하고, 1939년 8월 30일 1940년 1월 17일까지 인쇄하였다. 『格致藁』는 1940년 3월 18일부터 7월 5일까지 인쇄하였다.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은 1940년 8월 3일에 출판 허가를 받아, 1940년 12월 1일부터 1941년 1월 16일에 인쇄하고, 1940년 2월에 발행할 계획이었던 듯하나, 판권지에는 1941년 2월 10일 인쇄 4월 10일 발행으로 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을 한두정 선생은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의 맨 뒷장에 기록해 두었다. 선생의 치밀하고 철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9)물론 『東醫壽世保元』이 이미 초판부터 6판본까지 출간된 이력이 있으므로 출판의 필요에서 순위가 밀린 까닭도 있을 것이나, 7版本인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에 쏟은 한두정 선생의 功과 精誠을 생각하면 『壽世保元』에서 정점을 찍으려는 생각이 있었다고 짐작한다.
10)1894. ~ 1961.
11)1899. 1. 12. ~ 1950. 1. 24.
12)東醫壽世保元甲午本終 歲庚辰七月二日韓敏甲筆
13)時庚辰臘月朔謄書于大田府石南村
14)咸山沙村本은 급하게 쓰고, 石南村本은 상대적으로 여유 있게 쓴 것이다.
15)治勳(1919~ ) 治文(1927~ )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