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더디가도 제 갈길은 다 간다: 어느 학자의 인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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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더디가도 제 갈길은 다 간다: 어느 학자의 인생 이야기
  • 승인 2020.12.25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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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히준

박히준

mjmedi@mjmedi.com


도서비평┃거북의 산책

“나는 느린 걸음이라도 나의 갈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고 믿는다. 바른길 아니고 옆길이라도 갈 곳까지 가야 한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옆길을 가면서도 나만의 철학을 만들고, 자연을 즐기며 순진하게 살아남았다. 그래서 얻은 것은 낭만적이면서도 단순한 일생이 되었다. 고생할 때나 순조롭게 지날 때나 내가 살아남은 일생은 따뜻한 정서가 함께 했다.”

조동협 지음, 도서출판 북산 출간
조동협 지음, 도서출판 북산 출간

어느 예술가의 인생이야기 같지요? 그러나 이 글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6·25 전쟁을 경험했으나, 미국 코넬대 교수로서, 그리고 세계적인 파킨슨병 연구자로서 우뚝 서신 조동협 교수님의 글입니다.

연구자로서 초년생이던 시절, 저는 우연한 계기로 조동협 교수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파킨슨병에 대한 침치료 효과를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게 되었지만, 많은 것들이 낯설어 허둥지둥 발표를 끝내고 내려왔을 때, 어느 친절한 노교수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어떻게 다리에 침을 놓았는데 뇌의 도파민 신경이 변할 수 있습니까? 미국에 있는 다른 동료 신경과학자들에게 알려주면 그들도 놀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경과학 분야 대가의 눈에 제 연구는 당연히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입견 없이 건네신 친절한 말씀 한 마디가 지금도 제게는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나침반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만난 교수님은 참 특이하신 분이셨습니다. 누구보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갖고 계시고, 새로이 제안하는 연구 가설을 말씀하실 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신 교수님, 그러나 유쾌한 유머는 늘 양념과 같았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면 문득 교수님이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하셨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교수님께서는 어떤 삶을 살아오셨고 어떤 인생의 철학을 갖고 계시기에 그런 열정과 여유로움을 함께 갖고 계신지 궁금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반갑게도 조동협 교수님께서 직접 인생과 생각을 담아 쓰신 “거북의 산책”이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어린시절 천천히 가는 거북이가 이리 저리 산책하듯 걸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아버님의 “더디 가나 빨리 가나 갈 길은 다 간다.”는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며 힘든 인생과정마다 서둘지 않고 살아내신 인생을 담담히 풀어내셨습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학자임에도 본인의 업적을 자랑하기보다 삶에 대한 성찰과 따뜻한 이야기를 담아, 누가 읽어도 마음의 울림이 있는 글들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연구자로서의 삶에 대해, “일생을 통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을 갖고 살았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언제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새로운 가설을 만들다 보니 남들이 하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와 같은 태도 때문에 나 스스로 새로운 결과를 만들고 그것을 발표하며 많은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새로운 개념, 새로운 기술, 현실에 도전하는 논문을 즐기며 그 논문의 저자와 친하게 지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기가 하는 일의 탐험가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라며, 성과를 쫓기보다 탐험가와 같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말라고 제안해 주고 계십니다.

어느덧 2020년을 마무리하고 새해 맞을 준비로 분주한 때입니다. 저는 한해 두해 시간이 쌓일수록 과연 어떤 연구자가 되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집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잠시 멈추어 생각하게 될 때마다, 다행히도 길을 잃지 않도록 영감을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되어 혹독한 시대를 살아내면서도 따스함과 유머를 잃지 않은 대가의 삶과 생각이 궁금해지신다면, 2021년을 이 책과 함께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조동협 교수님께서 2020년 12월 22일 소천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히준 / 경희대 침구경락융합연구센터 소장, 경희대 한의대 교수, 장-뇌축기반 맞춤형 침치료기전연구실 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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