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原者에 대하여(23)- 빛-에너지 수송시스템(carrier-system): 장기(臟氣)·부기(腑氣)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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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原者에 대하여(23)- 빛-에너지 수송시스템(carrier-system): 장기(臟氣)·부기(腑氣) ⑦
  • 승인 2020.11.27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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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모

김선모

mjmedi@mjmedi.com


-지난 회에 이어-

 

1. 철수의 하굣길

02章 黃帝曰, ①氣之過於寸口也, 上十焉息? 下八焉伏? ②何道從還? 不知其極。③岐伯曰, 氣之離臟也, 卒然如弓弩之發, 如水之下岸, ④上於魚以反衰, 其餘氣衰散以逆上, 故其行微。

지난 시간 제가들의 해석상 황제(黃帝)와 기백(岐伯)의 문답(問答)이 상응(相應)하지 않음을 확인함으로써 상하(上下)에 대한 제가들의 〈논리적 구조〉가 매우 취약해짐을 알아보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➂과 ➃의 문장에 돌아오는 길(還道)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반쇠(反衰)의 단어를 논거로 십(十)과 팔(八)을 ‘정도의 차이’로 인식함으로써 자연스레 상(上)어제(魚際)까지의 전(前)과정은 상도(上道)로, 어제(魚際)이후의 과정은 하도(下道)로 단정(斷定)하게 된 것 뿐이다. 따라서 하도(下道)는 환도(還道)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제가들은 그 기록되지도 않은 하도(下道)를 앞다투어 정의(定義)하고 있다.

“어느 길로 갔다 돌아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는 질문해석은 “기(氣)가 장부(臟腑)를 떠날 때는 매우 힘차게 떠났다가 어제(魚際) 이후에는 기(氣)가 반쇠(反衰)되어 약해집니다.”라는 대답의 질문이 될 수 없음에도 그 ‘어느 길’에 대해 본인들의 상상을 핏대세워 소리치고 있다.

이는 “철수는 하굣길에 어느 길로 집에 왔을까요?” 라는 질문에 “철수가 아침에 집에서 나갈 때는 매우 기운이 넘쳤는데 학교에 갔더니 많이 피곤해졌다”라는 단서밖에 없음에도 심심함을 못참는 철수는 분명 친한 친구들과 지하철을 탔을 것이라는 둥 아니다 피곤하니 택시를 탔을 것이라는 둥, 결론도 없는 주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꼴인 것이다.

심지어 애초부터 철수의 하굣길에 대한 질문도 아니었다.

 

2. 타짜 양상선 선생

알고나면 헉소리 날만한 이 제가들의 허술한 해석은 양상선 선생의 해석에서 더욱 교묘하게(?) 기술되어 있다.

1) 『太素』: 氣는 謂手太陰脈氣가 從手寸口로 上入肺而息하고 從肺로 下至手指而屈이라 伏은 屈也라 肺氣가 循手太陰脈道하여 下手至手指端하고 還肺之時에 爲從本脈而還가 爲別有脈道還也아 吾不知端極之也라

2) 『太素』: 氣, 手太陰脈氣也. 手太陰脈氣, 從胃中焦上入於肺 下腋向手上魚, 至少商之時, 以乘藏府(盛氣, 如弓弩之發機, 比湍流之下岸, 言其盛也. 從少商反迴, 達上向肺, 雖從本脈而還, 以去臟腑漸遠, 其臟腑)餘氣衰散, 故其行遲微(之)也. (《영추연구집성》의 각주와 해석에 『태소』의 원문내용이 아예 빠져있어 필자가 채워 넣음)

1)은 황제(黃帝)의 질문해석이고 2)는 기백(岐伯)의 답변해석이다.

1)은 “돌아오는 길이 본맥(本脈)을 따라 돌아오는지 아니면 별도의 맥도(脈道)를 통해 돌아오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爲從本脈而還가 爲別有脈道還也 吾不知端極之也)”라고 질문을 해석하고 2)의 문장에서 “(從少商反迴~) 장부(臟腑)의 기(氣)가 소상(少商)에서 방향을 바꿔 폐(肺)로 향할 때 비록 본맥(本脈)을 따라 돌아간다 하더라도(雖從本脈而還) 이미 장부(臟腑)로부터 점점 멀어졌기 때문에 그 장부(臟腑)의 여기(餘氣)는 쇠산(衰散)할 수 밖에 없습니다.”라는 〈창의적 답변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문장내의 핵심근거들을 연결하고 살을 덧붙이는 의역(意譯)이 아님을 명심하자.)

이 해석은 왜 창의적인가?

이 해석은 “황제(黃帝)께서는 수태음맥기(手太陰脈氣)가 다른 경로로 돌고 돌아 오는지, 잘 뚫린 수태음폐맥(手太陰肺脈)을 타고 오는지 궁금해 하시지만 어제(魚際)에 도달했을 때 장부(臟腑)에서 받은 기(氣)는 이미 쇠(衰)해졌으므로 비록 그것이 잘 뚫린 수태음폐맥(手太陰肺脈)을 따라 돌아온다 하더라도 수태음맥기(手太陰脈氣)는 이미 매우 약할 것입니다. 어느 경맥을 따라 돌아오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양상선 선생은 황제(黃帝)의 질문을 개무시하고 있는 기백(岐伯)에 빙의(憑依)라도 한듯 ‘내가 답(答)하지 않는 이유를 알려주겠노라’ 창의적 해석을 끼워넣어 자문자답(自問自答)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기백(岐伯)의 답변에서 결정적으로 황제(黃帝)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빠졌다는 불합리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반증(反證)한다.

양상선 선생은 기백(岐伯)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보내고 있는 열혈팬인가? 아니면 스리슬쩍 조작(?)된 화투로 호구(虎口)의 영혼까지 털어 먹는 타짜인가? 그의 의도가 어떠하든 불합리성을 눈치 챈 최초의 의가(醫家)임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3. 제가(諸家)들과 양상선(楊上善)의 환(還)

황제(黃帝)의 질문과 기백(岐伯)의 답변이 논리적으로 상응(相應)하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제가(諸家)들의 문답해석이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기백(岐伯)의 답변을 살펴보기에 앞서 황제(黃帝)의 질문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글자가 또하나 있다. 바로 하도종환(何道從還)의 환(還)이다.

환(還)은 돌아오다, 되돌아오다. 돌려보내다. 돌다. 회전하다. 원을 그리다. 둥글다. 빠르다. 는 뜻이다. 환(還)이란 ‘기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반환점’에서 되돌아온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還)이 기준(基準)점과 반환(返還)점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內包)하고 있다는 점이다.

『太素』: 氣는 謂手太陰脈氣가 從手寸口로 上入肺而息하고 從肺로 下至手指而屈이라 伏은 屈也라 肺氣가 循手太陰脈道하여 下手至手指端하고 還肺之時에 爲從本脈而還가 爲別有脈道還也아 吾不知端極之也라

馬: 脈之過於寸口也에 上之從息而行者는 可擬十分이요 下之伏於臟內者는 可擬八分이나 但不知其何道而來며 何道而還하여 罔有抵極하니 帝之所以復問也라

景岳: 寸口는 手太陰脈也라 上下는 言進退之勢也요 十八은 喩盛衰之形也라 焉은 何也라 息은 生長也라 上十焉息은 言脈之進也에 其氣盛하니 何所來而生也오 下八焉伏은 言脈之退也에 其氣衰하니 何所去而伏也오 此其往還之道는 眞若有難窮其極者라

위는 상하(上下)에 대한 제가들의 해석이다.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폐(肺)로부터 출발한 맥기(脈氣)가 수지(手指)까지 운행하는 경로를 상도(上道)라 하고 어제(魚際)에서 반쇠(反衰)한 기가 복(伏)하게 되는 부분부터(소상(少商)이나 어제(魚際)와 같은 구체적 기술은 없다.) 폐(肺)로 돌아오는(還) 경로를 하도(下道)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제가들의 암묵적(暗黙的) 기준점과 반환점은 각각 폐(肺)와 소상(少商)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제가들이 손끝에서 복(伏)하게 됨으로 인해 방향을 전환(轉換)하게 되는 환(還)의 의미를 해석할 뿐이지 구체적 반환점이나 그의 상대인 기준점을 추론해 함께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단, 양상선 선생은 유일하게 기준점을 촌구(寸口)로 인식한 구체적인 상도(上道) 하도(下道) 운행방향을 기록하고 있어, 우리로 하여금 양상선 선생이 환(還)이 내포(內包)하고 있는 기준점과 반환점에 대한 개념을 인식하고 기술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선생의 ‘하도종환 부지기극(何道從還 不知其極)’의 해석에서 환폐지시(還肺之時), 즉, “수지단(手指端)에서 폐(肺)로 돌아올 때”를 환(還)이라 인식한 것을 보면 선생이 말하는 종수촌구(從手寸口)의 촌구(寸口)는 상도(上道) 하도(下道)를 구분하기 위한 기준점으로서의 촌구(寸口)를 말한 것이지 하도종환(何道從還)의 환(還)이 내포하고 있는 기준점으로서의 촌구(寸口)를 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환(還)의 개념에서 반환점과 기준점을 모두 손끝으로 판단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양상선 선생은 ‘종수촌구 상입폐이식(從手寸口 上入肺而息)’, 즉, 촌구(寸口)로부터 입폐(入肺)의 경로를 상도(上道)라 말하고 있어 청기상주어폐(淸氣上注於肺)의 폐(肺)로부터 어제(魚際)로의 경로를 상도(上道)라 말하는 다른 제가들과 정반대의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제가들과는 뭔가 다른 환(還)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제가들이 ‘상십언복 하팔언복(上十焉息 下八焉伏)’의 십(十)과 팔(八)의 개념을 〈정도차이〉로 인식함으로 인해 어제(魚際) 이후의 약화된 경로를 하도(下道)로 연결한 개연성(蓋然性)이 있었던 것과 달리 양상선 선생은 ‘상언식 하언복(上焉息 下焉伏)’(양상선의 《태소》에는 십(十)과 팔(八)이 빠져있다.)에서 상도(上道)/하도(下道)의 경로구분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즉, ‘상(십)언식(上(十)焉息)’의 식(息)을 폐(肺)로부터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 어제(魚際)까지의 〈경로〉로 보았는가, 상하(上下)경로의 〈터닝 포인트〉=폐(肺)로 보았는가의 차이인 것이지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복(伏)을 장내(臟內)나 맥지퇴로(脈之退路)의 〈경로〉로 해석하거나, 굴(屈) 즉, 소상(少商)에서의 〈터닝 포인트〉로 해석한 것의 차이와 같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하도종환(何道從還)’의 도(道)를 ‘길’로 해석한 양상선 선생을 포함한 대부분의 제가들이 주장하는 반환점은 소상(少商)인 것이다.

하지만, 과연 환(還)은 제가들이 생각하는 그 정도의 의미일까?

 

-다음에 이어가겠다.-

 

김선모 / 반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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