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화천대유 - 가진 자의 마음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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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화천대유 - 가진 자의 마음가짐
  • 승인 2020.11.27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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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장

적게 가진 것과 많이 가진 것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이 가진 것을 고를 것이다. 물론 그게 무엇이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대부분 ‘모자른 것보다는 남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화천대유괘의 大有는 대체 얼마나 많이 있어서 크게 있다는 이름이 붙은걸까? 하늘 위에 태양이 빛나고 있는 모습이니 웅장하기 이를 데 없기는 하다. 말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모양새라 괘사도 아주 단순하다.

大有 元亨

彖曰 大有 柔得尊位大中 而上下應之曰大有 其德剛健而文明 應乎天而時行 是以元亨

화천대유는 양효 다섯개와 음효 한개로 이루어진 괘이다. 음효의 위치가 다른 다섯 괘들이 있지만, 화천대유의 음효는 주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다섯번째 자리에 있다.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존귀한 위를 얻었다 한 것이고, 밝은 태양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다섯개의 양효와 서로 잘 호응하고 있는 상황이라 형통하다고 했다. 천풍구 괘의 음효도 다섯개의 양효와 응하는 상황이었으나 그 해석은 매우 다르다. 단 하나 있는 여성이 말단의 자리에 있을 때와 리더의 자리에 있을 때의 차이가 몹시 큰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면 대유괘의 양효들이 음효와 어떻게 응하고 있는지 효사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初九 無交害 匪咎 艱則無咎

초구는 아무래도 입장 정리를 잘 해야 하는 자리인 것 같다. 좋지 않은 무리와 어울려 다니면 금방 허물이 잡히는 자리고, 근근히 고생을 해야만 겨우 그 허물을 벗어난다. 구호 사업을 하는 단체가 폭력배나 정치범과 관계가 있다면 당연히 허물이 생길 수 밖에 없고, 사람들이 모아준 성금으로 꼭 필요하지 않은 곳에 거한 지출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비난을 받게 된다. 사람이면 누구나 ‘이왕이면 다홍치마’의 심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런 욕구를 억눌러야 한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 조심하고 조심해야만 겨우 허물이 없는 수준이 된다.

九二 大車以載 有攸往 無咎

앞선 초구는 근근히 어렵게 해야 허물을 면하지만, 구이는 그래도 큰 수레에 실어도 된단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갈 바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재물을 크게 얻는다면 자기 주머니만 채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기업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을 후원하거나 선천성 심장병에 걸린 환아의 수술비를 지원하는 것들이 물론 마케팅의 한 방법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그 좋은 기억을 잊지 않고 그 기업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재물을 버는 것은 허물이 아니나, 매우 큰 돈을 번다면 그 뒤에는 항상 누군가의 피 땀 눈물이 있다. 그 사실을 알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재물의 일부라도 사용한다면 누가 허물을 잡겠는가.

九三 公用亨于天子 小人弗克

여기서 말하는 公은 천자의 신하인 제후를 의미한다. 또한 亨은 우리가 늘 보던 ‘형통하다’는 의미 대신 ‘제사를 올리다’ ‘드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이해가 될 것 같다. 公이 天子에게 바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소인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니 인간의 본능과 욕심을 넘어서는 행위인 것만은 분명하다. 내 주머니에 들어오기 전까진 내 돈이 아니라고 하던가. 천자에게 바칠 물건이라고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수도까지 올라가는 중에 무엇이 얼마나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알 수 없다.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아예 보내지도 않고 중간에 도둑맞았다 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불쌍한 사람들을 가엾이 여겨 모아준 성금을 중간에 가로채 자기 교회나 절을 짓거나 사리사욕을 채운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던가. 공이 천자에게 바쳤다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과 우리 이웃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다. 그 작은 정성들이 모인 것을 의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피땀으로 보지만, 소인은 그저 욕심을 채울 기회로만 보는 것이다.

九四 匪其彭 無咎

남이 무엇을 화려하게 하든 소박하게 하든 말을 보태지 않는 것이 미덕이다. 그러나 구사는 화려하면 허물이 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상전에는 明辨晢也, 즉 밝게 분별하는 지혜라고 하였다. 누군가의 결혼식장에 신부보다 화려하게 하고 가는 것은 민폐이다. 봉사활동을 하러 가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고 가는 것 역시 민폐이다. 화려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의 현재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치장은 허물이 된다. 있는 것을 굳이 뽐내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을 자랑하다보면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六五 厥孚交如 威如吉

여기까지 계속 허물이 없는 수준이 최선이었는데, 육오에 이르러 드디어 길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역시 조건이 있다. 믿음이 있게 사귀어야 하고, 위엄이 있어야 한다. 상전에는 象曰 厥孚交如 信以發志也 威如之吉 易而無備也라 하였다. 厥孚交如란 믿음으로서 뜻을 발한다는 것이고, 威如之吉은 쉽게 하면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육오는 여섯 개의 효들 중 유일한 음효이다. 아무래도 양효보다는 부드럽다. 그러나 육오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늘을 밟고 올라선 태양의 정중앙에 있다. 위엄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다섯개의 양효들을 음효 혼자 통솔하는 법은 그들이 자기를 믿게 하고, 자기도 그들을 믿는 것이다. 육오가 믿음을 주는 만큼 나머지 양효들은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니 허물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양효들이 만드는 허물은 곧 육오의 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삼에서처럼 소인이 있을 수가 있다. 소인에게는 믿음따위 아무런 힘도 없다. 그러니 위엄을 갖추어 그런 소인들마저 통솔해야 한다. 그래야 길하다.

上九 自天祐之 吉無不利

음양응도 되지 않는 자리의 상구는 좋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바로 아래의 5효가 음효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5효를 돕는 것이 아니라 휘두르려고 하거나, 음양응이 되지 않는 자기 짝을 밀어내어 질서를 어지럽히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대유괘의 상구는 그 어떤 효사들보다 길하다. 대체 왜일까?

공자께서는 이 효사를 두고 祐者 助也 天之所助者 順也 人之所助者 信也 履信思乎順 又以尙賢也 是以自天祐之 吉无不利也(祐는 도움이니, 하늘이 도와주는 것은 순응하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은 미덥기 때문이니, 믿음을 이행하여 순응함을 생각하고 또 어진 이를 숭상한다. 이 때문에 하늘로부터 도와서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라 하셨다. 하늘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자를 돕고, 사람들은 믿음이 가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은 인간의 머리로는 좀처럼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니 그저 자포자기인 것을 하늘의 뜻에 순응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구는 자기가 따라야 하는 하늘의 뜻을 알고 믿으며 실천하는 사람이다. 응할 수 없는 구삼도 바로 옆에 있어 그 어떤 양효들보다도 먼저 취할 수 있는 육오도 상구에게는 의미가 없다. 상구는 그저 육오가 갖추어야 할 위엄의 든든한 배경이 되며 응함에 상관없이 아래의 효들을 두루 살피고 돕는다. 그러니 길하고 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대유괘는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소유가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효사를 하나씩 읽어보면 어렵게 하라, 꼭 가져야 한다면 반드시 써야 할 곳이 있어야 한다, 소인이 되지 마라, 화려하게 하지 마라, 그런 말들이 더 많다. 많이 가질 수 있으니 다 가지라는 게 아니라, 많이 가졌으면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라는 것이다.

요즘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님 한 분의 방송 출연과 부동산 시세 차익 획득으로 말이 많다. 탁발이 불가능한 시대에 스님이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절에 가니 수입이 어마어마 하더라, 스님이 무슨 고급차를 몰더라 하는 이야기들도 고깝게 듣지 않는다. 스님은 산골짜기에서 누더기나 걸치고 풀죽 같은 거나 먹으면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깨달음이 무조건 그런 처절한 고행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감히 살 수 없는 삶을 살면서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기생충에서 ‘돈이 다리미다, 나도 돈 있으면 구김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나온 것처럼, 아무나 살 수 없는 삶을 살면서 느낀 것을 매일 경제적 문제로, 인간관계로, 육아로, 고부갈등으로 힘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무소유’를 예로 들며 법정스님께서 인세가 있으셨기에 하실 수 있었던 말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스님의 가르침을 깎아내리며 가볍게 입을 놀린 것이고, 누구나 쉽게 살 수 없는 고급 주택에서 살며 남들에게는 ‘물질적 소유만이 행복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심한 괴리감을 줄 뿐이다. 화려하다면 자랑하지나 말 것이며, 돈이 많다면 남을 돕는데 쓸 것이고, 부처님을 위엄의 근거로 삼으려거든 남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할 것인데, 그 어떤 것도 솔선수범하지 못하는 스님을 어떻게 멘토로 삼을 수가 있을까. 한쪽에서는 환경 파괴와 난개발과 싸우고 노숙인을 보듬으며 누군가의 애처로운 죽음에 자기 일생을 불사르는 종교인이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분들의 후광을 입고 한가로이 입으로 좋은 소리를 하며 스승 행세를 하는 사람이 있다니,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공자님이든 고개를 저으실 일이다. 크게 가지라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늘에 순응하는 큰 뜻이며 惠民-사람들에게 베푸는 마음이라는 것을 그 스님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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