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原者에 대하여(22)- 빛-에너지 수송시스템(carrier-system): 장기(臟氣)·부기(腑氣)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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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原者에 대하여(22)- 빛-에너지 수송시스템(carrier-system): 장기(臟氣)·부기(腑氣) ⑥
  • 승인 2020.11.13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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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모

김선모

mjmedi@mjmedi.com


1. 《황제내경》해석을 위한 독자(讀者)의 조건

《황제내경》은 공간(空間)으로는 ‘천지지간, 육합지내(天地之間, 六合之內)’를 포함하고 시간(時間)으로는 만물(萬物)의 시종(始終)과 우주(宇宙)의 변화(變化)를 논한다. 《황제내경》의 언어들은 《소문》 81편과 《영추》 81편의 놀랍도록 체계적인 구조를 통해 그 광범위한 시공간(時空間) 개념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언어는 매우 함축적이고 그것으로 설명된 개념들은 난해하다. 당대에 명성으로 사해(四海)를 뒤흔들었던 의가들조차 《황제내경》해석에서 각자 의견이 분분(紛紛)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내경》 해석에 있어 이해의 범위와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독자의 수준에 달려있다. 그 수준의 기준은 무엇인가. 일천 수백년간의 《황제내경》해석역사를 들여다 본다면 핵심을 꿰뚫어보는 통찰력(洞察力)과 지적능력(知的能力)이 독자의 기본소양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계속된 당대 천재들의 끊임없는 논쟁들이 있었음을 볼 때 분명 지적능력 이외의 필수요건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하더라도 《황제내경》의 높은 지적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낮은 이해의 조각들을 딛고 한걸음 한걸음 이해의 수준을 높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재능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고난(苦難)한 과정임에 틀림없다. 글자의 직역(直譯)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저술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황제내경》의 이해에 도달한 그 과정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적능력을 의심받을 리 없는 그 수많은 당대의 천재들에게 인내심 하나가 부족하여 그 오랜 싸움을 끌고 있었다 얘기한다면 일말의 의문이 들만 하다. 《황제내경》해석에 필요한 인내심이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리 어려웠단 말인가?


2. 자문자답(自問自答)의 환청(幻聽)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일 때까지 끈질기게 들이대는 것이 사랑을 얻기 위한 인내(忍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결정이 상대방과 교감(交感)한 결과라고 착각한다. 상대방의 반응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이러한 확증편향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신념을 강화시킨다. 상대의 반응이 무시건 분노건 짜증이건 더 이상 상관이 없다. 그는 자기 자신과 묻고 답한다. 그가 착각하는 인내(忍耐)는 상대없는 자문자답(自問自答)의 집착(執著)이다. 인내와 집착은 모두 끈질기다. 하지만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인내(忍耐)와 상대는 안중(眼中)에도 없는 집착(執著)은 전혀 다른 노력이다.

《황제내경》을 열심히만 본다고 인내심의 덕목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겸손(謙遜)없이 고수(高手)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해의 대상에 대한 경외심(敬畏心) 없이 교만하는 순간, 저자(著者)는 물론 타인과의 소통은 단절(斷切)돼버리고 머릿속은 자문자답(自問自答)의 환청(幻聽)만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의 의사(意思)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착하는 사람들처럼, 《황제내경》을 망상(妄想)수준의 자문자답(自問自答)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도 흔하다. 겸손하지 못한 인내심은 고집(固執)과 집착(執着)의 행태를 낳는다. 물론 저자의 의도파악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기 멋대로의 해석에 빠지게 한 지적능력(知的能力)의 부족도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3. 상응(相應)하지 않는 질문(質問)과 대답(對答)

역대제가들의 해석에는 기본적으로 《황제내경》에 대한 신뢰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현들을 일순간 자만(自慢)하게 만들었던 부분은 어디였을까?

제가들이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선보이는 상하(上下)에 대한 해석들은 실낱같은 가능성을 타고 이어져 왔다. 1장 ‘청기상주어폐(淸氣上注於肺)’의 상(上)은 상십(上十)/하팔(下八)의 상(上)으로 이어지고 하도종환(何道從還)/반쇠(反衰)의 격차개념은 다시 상십(上十)/하팔(下八)에서 하(下)의 존재를 확신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의가들은 여기까지의 〈논리적 구조〉에 동의하고 있으며 이것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황제내경》 어느 곳에도 없는 각자의 하(下)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도취(陶醉)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2장의 연결고리들이 나름의 〈논리적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나름의 〈논리적 구조〉가 내심 만족스러웠던 것일까 마치 자신들의 논리에 취한듯 매우 중요한 점을 간과(看過)한다.

何道從還? 不知其極。

마시(馬蒔): “... 다만 그것이 어느 길로 오고 어느 길로 돌아가는지를 알지 못하여 끝나는 곳이 없는 것 같으므로 黃帝께서 다시 질문하신 것이다.”고 하였고

경악(景岳): “... 어느 곳으로 가서 잠복되는가하고 말한 것이다. 이 脈이 가고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그 끝을 窮究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하였다.

황제(黃帝)의 질문은 돌아오는 ‘어떤 길’에 대한 것이었음에도 기백(岐伯)의 대답은 ‘어떤 길’에 대한 언급은 일절없이 엉뚱하게도 ‘맥기(脈氣)는 매우 강하게 장부(臟腑)를 출발해 어제(魚際)에서 약해집니다’라고만 답하고 있다.

이렇듯 제가들의 해석에 따르면 2장의 질문과 대답은 연결되지 않는다. 기백(岐伯)이 황제(黃帝)의 질문을 무시하는 이러한 질의(質疑)/답변(答辯) 형식을 《황제내경》에서 찾을 수 있을까?

만약 이러한 문답이 가능할 상황을 현실에서 가정해 본다 하더라도 1. 질문자의 질문이 가당찮게 어리석은 질문이거나 2. 답변자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 정도다.

이는 《황제내경》에서 가능한 형식이 아니다. 물론 황제(黃帝)가 잘못된 질문을 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황제(黃帝)의 질문 중 틀린 부분을 기백(岐伯)이 바로 잡아주는 형식을 택함으로써 그 글의 주제를 보다 명확하게 강조해주는 하나의 형식인 것이지 그 잘못을 이리도 민망하게 무시하는 형식은 없다.

《황제내경》이 문답의 형식에서 그 주제를 벗어나는 일은 결코 없음을 이해한다면 제가들의 해석에서 문제점을 찾는 것이 당연하다.

 

4. 하도종환(何道從還)의 도(道)

하지만 제가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제가들의 그 〈논리적 구조〉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생각하면 기껏해야 일부 단어의 어감(語感)에 문제가 있거나 토시하나 문제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러운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제가들의 그 정도 확신을 비집고 들어가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도 민망하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매우 치명적이고도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백(岐伯)의 답변 “기백왈, 기지이장야, 졸연여궁노지발, 여수지하안(岐伯曰, 氣之離臟也, 卒然如弓弩之發, 如水之下岸)”은 명백히 〈운행(運行)의 양상(樣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황제(黃帝)의 질문도 어떠한 〈양상(樣相)〉에 대한 설명이어야 함이 마땅하다.

하도종환(何道從還)의 하(何)는 어찌 하다. 여기서는 어느, 어떤이란 뜻이다. 도(道)는 길 도다. 여기서는 방법, 술책이란 뜻이다. 하도(何道)는 어떤 방식, 어떤 방법이란 의미다. 종(從)은 좇을 종이다. 좇다, 뒤를 밟아 따르다. 부터≒自. 말미암다, 인연하다. 란 뜻이다. 환(環)은 돌아올 환이다. 돌아오다, 되돌아오다. 돌려보내다는 뜻이다. 하도종환(何道從還)은 폐기(肺氣)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되돌아 나오는가 하는 뜻이다. 부지기극(不知其極)의 극(極)은 다할 극이다. 다하다. 끝나다. 극, 한계, 더할 수 없는 막다른 지경이란 뜻이다. 그 극(極)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폐기(肺氣)가 운행하는 가장 안쪽의 극에서 벌어지는 일을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동의16형인. 권건혁 著》

즉, 기백(岐伯)의 답변을 고려한다면 황제(黃帝)의 질문 하도종환(何道從還)의 도(道)는 ‘길 도(道)’가 아니라 ‘방법 도(道)’로 해석되어야 타당하다. 즉 ‘어떠한 길’이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 돌아오는가라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방법(方法)이라는 도(道)의 의미도 역시 길 도(道)에서 파생된 것이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일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제가들의 〈논리적 구조〉에서 ‘하도(何道)’의 도(道)는 그저 ‘길’로 해석되지 않았음을 상기(想起)해야 한다. 제가들에게 하도종환(何道從還)의 ‘도(道)’는 단지 ‘길’의 의미가 아닌 ‘상(上)’과 상대되는 ‘하도(下道)’ 즉 ‘환도(還道)’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도(何道)’의 ‘길’로써의 의미가 부정(否定)되는 순간, 의가들이 그토록 확신해마지 않던 ‘하도(下道)’의 존재가 뿌리째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5. 제가(諸家)들의 교만(驕慢)

‘길’이라는 존재는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 공간을 의미한다. 방향성을 가지지 않은 길이란 이미 길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제가들이 ‘길’에 대해서 명확한 〈논리적 구조〉를 세웠다면 보다 명확히 ‘길’의 방향성에 대해 설명해야하는 것이 해석자로서의 도리다.

하지만, 지난 기고에서 밝혔듯이 거의 대부분의 제가들은 황제(黃帝)의 ‘하도종환 부지기극(何道從還 不知其極)’ 질문을 도대체 상도(上道)와 하도(下道)가 지나는 길이 정확히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뭉게버림으로써 본인들이 이름에서부터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상도(上道)와 하도(下道)의 명확한 상하(上下)방향성조차 언급하거나 문제제기하지 않고 그저 형세(形勢)의 차이(景岳)라거나 십분(十分) 팔분(八分)정도의 차이(馬蒔)와 같은 〈정도의 차이〉로 어물쩍 넘어간 것은 무책임하기 이를데 없는 해석이라 할 것이다.

있지도 않은 하도(下道)의 개념에 대해서는 너도 나도 마치 자신만의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 것인양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더니 정작 질문(質問)과 대답(對答)의 상응여부(相應與否) 확인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서는 언급한 이 하나 없었다. 제가들로 하여금 경전(經典)의 뜻에 귀를 닫고 눈을 감게 만든 것은 교만(驕慢)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음에 이어가겠다.


김선모 / 반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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