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뇌화풍 - 결핍의 경계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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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뇌화풍 - 결핍의 경계①
  • 승인 2020.10.30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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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 원장
박혜원
장기한의원 원장

요즘의 자기계발서는 하나같이 인생의 풍요로움을 끌어당기는 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크릿 등의 긍정론이나 ‘끌어당김의 법칙’이 대유행한 것이 몇 년 전인데도, 아직도 이 유행은 식지 않고 꾸준한 것 같다. 풍요로움은 누구나 바라 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풍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지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농부의 풍요로움이란 들판에 가득찬 잘 익은 이삭일테고, 공장장에게는 주문받은 물건이 그득 쌓여 있는 모습이 곧 풍요로움일 것이다. 주역에도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괘가 있다. 주역의 풍요로움은 무엇을 의미할까?

뇌화풍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豊 亨 王假之 勿憂宜日中

풍요로우니 형통할테지만, 왕이 지극히 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일까? 단전을 보자.

彖曰 豊大也 明以動 故豊 王假之 尙大也 勿憂宜日中 宜照天下也 日中則仄 月盈則食 天地盈虛 與時消息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

뇌화풍 괘는 위에는 번개를 의미하는 뇌괘가 있고, 아래에는 불을 의미하는 리괘가 있다. 번개는 이쪽 저쪽을 금새 옮겨다니며 치는 것이니 움직이는 것이고, 불은 밝게 타오른다. 그래서 밝음으로써 움직인다고 한 것이다. 숭상하는 것이 크다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풍요로움이 단지 개인적 영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이상을 가진 것이고, 그 풍요로움으로 천하를 돌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을 이루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다. 가득 차면 더 이상 담을 수 없게 되는 것, 그게 풍요로움의 본질인 것이다.

初九 遇其配主 雖旬无咎 往有尙

초구는 구사와 짝이 된다. 그러나 둘다 양효라 음양응이 되지 않으니 화합할 수가 없다. 주역에서는 더 위쪽에 있는 효가 더 높다고 본다. 그러므로 첫번째 효는 가장 힘이 없고 미약한 존재다. 그러나 초구는 양의 자리에 있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효다. 반면 구사는 더 높은 곳에 위치했지만 음의 자리에 있는 양효라 자리가 바르지 않다. 그러니 둘이 비록 음양응도 되지 않고 신분의 차이도 있지만 같이 일을 도모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전에 이르기를 雖旬无咎 過旬災也라 하였다. 이 균등한 상태를 지나치면 재앙이라는 뜻이다. 왜 그럴까?

동업이든 협업이든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고생하는 경우가 좀처럼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더 잘하니 그 일을 더 많이 했고, 누군가는 저것을 더 잘하니 그 일을 더 많이 하여 좋은 결과를 낼 수는 있지만, 속으로는 ‘내가 일을 더 많이 했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너와 내가 똑같이 고생했으니 그 결과에 따르는 이득도 공평하게 나누자는 말에 흔쾌히 동의하면 문제가 없으나, 너와 나의 지분이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동업관계든 친구사이든 원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니 재앙이라고 할 만 하다.

六二 豊其蔀 日中見斗 往 得疑疾 有孚發若 吉

蔀는 지붕이나 차양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 포장이 얼마나 대단하면 한낮에 북두칠성처럼 반짝이는 별을 보는 것과 같을까. 그러나 실상은 한낮에 별이 보일 만큼 그 포장 안은 어둡다는 뜻이다. 육이는 육오의 짝이지만 음양응이 맞지 않는다. 밝은 불인 리괘의 중앙에 있으며 음이 음자리에 있는 육이지만, 커다란 차양으로 그 밝은 빛을 가리고 있다. 왜냐하면 육오가 육이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래자불선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호의를 보이며 먼저 접근하는 경우 끝이 좋은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이유없는 호의를 보인다면 일단 의심하라고 우리는 배웠다. 그것은 각종 사기와 보이스 피싱이 난무하는 현대사회 뿐만 아니라 주역의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자기 짝인 육이지만 그토록 밝은 빛을 내며 다가오면 육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저 육이가 나의 풍요로움을 빼앗아가려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러니 육이는 자기 빛을 가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자기의 진심을 육오가 알아주리라 믿으면서.

九三 豊其沛 日中見沬 折其右肱 无咎

세번째 효는 내괘에서 외괘로 넘어가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힘이 강하다. 그리고 양의 자리이다. 구삼은 제자리에서 힘을 쓸 수 있는 효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오른팔이 잘리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육의 짝이기 때문일 것이다.

구삼은 뇌화풍 괘에서 유일하게 상육과 음양응을 이루며 짝이 되는 효이다. 그런데 음양응을 이루지 못한 다른 효사들보다 더 비참한 상황이다. 그 이유는 나중에 상육을 이야기할때 다시 말하겠지만 구삼이 가진 것을 상육이 사용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여기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의 부모나 가족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어울리지도 않는 일을 평생 하다가 아무런 업적도 이루지 못하고 늙어 죽었다. 남을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에 헌신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재산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족들은 그가 자선사업을 하는데 돈을 사용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결국 그는 죽을때 싸들고 가지도 못하는 돈을 남기고 세상 사람들에게 수전노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세상을 떴다.

이런 일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재능의 풍요로움, 재산의 풍요로움, 아이디어의 풍요로움, 헌신과 사랑의 풍요로움이 제 자리를 만나지 못하고 그냥 버려진다. 쓸 수 없는 풍요로움을 과연 풍요라 부를 수 있을까. 상전에는 豊其沛 不可大事也 折其右肱 終不可用也 하였다. 큰 일은 할 수 없고 결국 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된 것을 알고도, 당첨 복권 자체를 찾지 못해 돈을 찾아 쓸 수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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