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천산둔 –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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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천산둔 –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 승인 2020.08.28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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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
박혜원
장기한의원

‘낄끼빠빠’라는 말이 있다. ‘낄데 끼고, 빠질데 빠지자’라는 말이다. 눈치 좀 있어라, 공기 좀 읽어라 하는 타박과 함께 길게 쓰기도 귀찮아서 만들어낸 줄임말은 은근한 흥행을 타고 인터넷 세상에 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놈의 빠질 곳은 어딘지 빠질 타이밍은 언젠지 아는 건 무척 어렵다. 이걸 잘 하는 사람이 사회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고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하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은 주역이 만들어진 시대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던 것 같다.

‘물러나다, 은둔하다’라는 뜻을 가진 천산둔 괘의 괘사는 이렇다.

遯 亨 小利貞

형통한데 바르게 해야 조금 이롭다니. 주역의 ‘형통하다’는 말이 길하다, 잘된다, 크게 이익이 생긴다와 조금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彖曰 遯亨 遯而亨也 剛當位而應 與時行也 小利貞 浸而長也 遯之時義 大矣哉

물러날 때를 알고 물러나면 형통한 것은 맞지만, 점차 길어지니 조금 이롭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물러난 다음에도 계속 일이 이어지면 바르게 해주는 것이 맞지만, 그것이 계속되면 물러난 것이 아닌 상황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으로 계속 이익을 얻거나, 물러나서 큰 이익을 챙기면 바른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결국은 완전히 물러나야 하고 그것이 시의적절해야 한다는 말이다.

初六 遯尾厲 勿用有攸往

도망가지 말아야 할 자리에서 도망가다가 딱 걸리는 경우를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법 하다. 중요한 회의나, 수업이나, 하다못해 빠지기엔 너무나 눈치 보이는 회식 자리에서 몰래 빠져 나오려는데 그게 감쪽같이 빠져나올 수 없는 자리라면 빠지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게 낫다. 그 자리에는 내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 그 자리의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생긴다. 초육이 딱 그런 상황이다.

六二 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누런 소의 가죽은 또 뭐고 이겨서 말을 못한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주역에서 누런색이 나왔다 하면 중앙이라는 뜻이다. 육이는 내괘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고 구오와 서로 음양응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말 못할 사정은 무엇인가? 그건 육이가 그 말을 해선 안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상전에는 執用黃牛 固志也라고 되어 있다. 뜻을 굳게 한다는 말이다. 논쟁에서 이길 정도로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동조한다는 뜻은 아니다. 뜻은 확실히 하되 강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육이가 아직 물러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육이의 효사에 遯자가 없는 것은 아마 이것 때문일 것이다.

九三 係遯 有疾厲 畜臣妾吉

매여서 물러난다는 것은 어떤 상황일까. 그 다음 문구가 힌트인 것 같다. 어떤 자리에 있던 사람이 병을 얻어 그 자리를 비우게 되면 바로 사직하는 게 아니라 병가를 내는 일이 흔하다. 그게 암과 같은 큰 병일 경우에도 보통 병가를 먼저 내고, 치료와 회복에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하거나 병세가 위중한 경우 퇴직하게 된다. 그러니 일에서 손을 뗀 것은 맞지만, 아직 내가 몸담고 있던 곳과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효사에서는 臣妾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잘 해주는 편이 좋고 병으로 인해 변화할 자신의 일상 생활도 그에 맞추어 바꿔나가는 편이 좋다. 치료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에 대한 대책도 안팎으로 세워두는 것이 좋다. 상전에는 畜臣妾吉 不可大事也라 했다. 큰 일은 이룰 수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일과 내 일을 대신 해줄 후임을 양성하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을 그만두지 않고 되려 더 일 욕심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九四 好遯 君子吉 小人否

한참 꿀빠는 자리에 앉아 있는데 일어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연히 어떤 자리에 취직을 했는데, 업무는 가볍고 남들이 다 알아서 해주는데 그중 내가 제일 돈을 많이 버는 상황이라면 누가 거기서 벗어나고 싶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그 자리에 어떻게든 천년 만년 붙어 있을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 자리를 내놓으며 이익을 고르게 분배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군자다. 누군가 하는 것에 비해 과한 이득을 얻는다면 그 누군가는 그 대신 일을 하고 일한 만큼의 댓가를 지불받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알고도 모른척 하는 것은 소인이며, 언젠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오면 그 충격은 몹시 클 것이다. 사람은 쉽고 편한 것을 한번 맛보고 나면 좀처럼 그것을 잊지 못한다. 그 자리를 내놓고 나서도 비슷한 자리를 찾아 헤매면 일이 잘 될 리 없다. 그러니 소인은 막힌다고 한 것이다.

九五 嘉遯 貞吉

구오는 외괘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양효다. 육이와 음양응도 이루고 있다. 정당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힘센 효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오는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이다. 이유라면 단 하나, 지금 구오가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대단한 업적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놓아주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2002년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냈을때 사람들은 히딩크 감독을 종신감독으로 임명해야 한다고들 했었다. 그러나 과연 그가 계속 한국에 남아있었더라도 계속 좋은 성과를 냈을지는 의문이다. 시대는 변하고 상황도 변하며 사람도 바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성과가 아무리 대단했더라도 이제 다른 사람을 앞에 세워야 할 때가 온다. 나의 업적이 대단하다고 해서 그 자리를 평생 누리겠다고 하는 것은 그냥 독재자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배우도 결국은 나이를 먹는다.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하는 나이의 배우가 성형수술로 억지로 만든 주름 없는 얼굴을 하고 딸 역할을 고집하는 것은 왠지 모를 거부감을 준다. 자기 나이에 맞는 역할을 찾아 천천히 세월과 함께 다른 배역으로 옮겨가는 오래된 배우들은 장인에게 느껴지는 존경심마저 갖게 한다. 아름답게 물러나면 모두의 기억 속에 그 아름다움이 남게 되는 법이다.

上九 肥遯 无不利

퇴사한 전임자가 퇴사한지 몇 년 지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내 업무에 간섭을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럼 당신이 와서 해보든가, 싶지 않을까. 이미 그 자리에서 벗어났으면 그 자리에 대한 미련도 간섭도 버려야 한다.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거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싶으면 내 자리에서 내 일을 그렇게 잘 하면 된다. 남의 일의 흠결은 찾아내기 쉽고 내가 알거나 해본 분야라면 더 그렇다. 그러나 상대가 조언이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이상 내 마음대로 간섭하고 잔소리하고 요구할 권리는 나에게 없다. ‘나라면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오만이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 이상 그 일을 망치든 잘 하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갖고 싶어하면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떠넘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잘못된 조언에 대한 책임도 ‘그러게 누가 억지로 시켰나’ 같은 말로 떠넘겨버리기 일쑤다. 정말로 돕고 싶다면 지지해주고 조언을 필요로 할 때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고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줄 용의가 있다는 것만 알려주면 된다. 그 자리는 내 것이 아니니 충분한 거리를 두고 내 자리를 지키면 서로 마음 상할 일도 없다.

어떤 사안이 있을때 자기 의견을 내는 것은 누구나 해도 되는 일이다. 그러나 남의 처지나 입장을 빌어 나를 뽐내는데 쓰거나, 더 심하게는 그 누군가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발판으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내가 입장을 대변하고 싶어하는 그 누군가가 유고 상태거나 모종의 사정으로 말을 하기 어려울 때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나의 생각을 전하는 것과 ‘그’와 나를 동일시하여 내가 그의 대리인이나 변호인처럼 구는 것은 많이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사안을 생각한다. 보통 사람에게는 손정우가 중죄인이지만 그의 아버지에게는 가정 경제를 책임진 아들인 것과 같이, 내가 어느 쪽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내가 아무리 ‘그’를 잘 이해한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가 될 수 없다. 내가 ‘그’의 앞에 나서 그가 하지 않은 말을 그가 하고 싶은 말처럼 이야기하고 나면,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여럿이 되면, 결국 그 여럿 중 한둘이 저지른 말실수나 행동의 잘못은 ‘그’의 것으로 귀속된다. 지지와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내가 그것을 핑계로 주목받고 싶거나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욕심을 표현하는 건 아닌가 되돌아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무엇이든 당사자가 아니면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 일의 결과나 책임도 당사자가 모두 짊어져야 한다. 말 한 마디의 무게가 어느 쪽에 실릴지, 그 누군가는 그 말에 어떤 상처를 입고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는 너를 위해서 했다’는 말이며 행동이 정작 당사자에게는 칼이 되어 돌아오는 일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봐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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